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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Jan 17. 2019

서른여덟, 6개월 만에 결혼하다 #3

오늘부터 우리는

과녁을 노려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앉았다 일어나며 월볼을 던진다. 과녁에 맞고 돌아온 월볼을 두 팔과 가슴으로 받으면서 앉는다. 푸시업을 한다. 상체를 먼저 들어 올리는 웨이브 푸시업이다. 바벨을 잡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똑바로 일어선다. 종료를 알리는 삐 소리가 날 때까지 월볼샷, 푸시업, 데드리프트를 반복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얼굴이 빨개지고 허벅지의 힘이 풀린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운동이 최고다. 몸을 힘들게 하면 잡생각이 달아난다.


두 번째 데이트 후 3일이 지났다. 그에게서 연락이 없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렇게 멀쩡한 남자가 나한테까지 차례가 왔을 때 의심했어야 한다. 그는 모태 솔로가 분명하다. 게이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말이 된다. 우리는 이번 주 토요일이 아니라 다음 주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혹시 만나기 하루 전에 연락하려는 걸까?


두 번째 데이트까지는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이제 그가 연락할 차례다. 관계는 한 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이어야 한다. 그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 번째 데이트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선을 본 사이지 대학 친구가 아니다. 문자 한 통 없다가 2주 뒤에 반갑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의 연락이 없는 동안 날씨는 맑았고, 지하철은 고장 나지 않았다. 북한에서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았고, 미국의 중대 발표도 없었다. 초미세먼지 경보가 울리거나 5월에 함박눈이 내리거나 떠들썩한 스캔들이 생겨야 연락이 오는 걸까? 먼저 연락하는 쪽이 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걸 보면 연애 고수인 건가? 세 번 만난 남자가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 운동 중이겠네? 난 이제 회사에 도착했어.


사물함에 넣어뒀던 휴대폰에 그의 문자가 와 있다. 조율한 피아노처럼 팽팽하던 긴장감이 풀린다. 내가 틀렸다. 그는 이 시간이면 내가 운동하는 걸 알고 있다. ‘옜다, 관심!’ 정도의 문자라고 해도 좋다. 그는 나를 쉬운 여자로 만든다. 망설이지 않고 답장한다. 그간의 침묵을 깨고 카톡이 오고 간다. 그의 카톡은 간결하고, 문체에는 힘이 있다. 맞춤법도 틀리지 않는다.


미스터리가 풀렸다. 이번 주말에 만나자고 하지 않은 건 1박 2일 회사 워크숍 때문이다. 마중물 같은 그의 선톡으로 우리는 매일 연락하는 사이가 됐다. 언제 퇴근하는지, 언제 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침에 10분 지각을 했고,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는 알게 되었다. 큰 진전이다.


금요일 오전에 연락이 왔다. 가평으로 출발한다고 했다. 그는 팀장이다. 팀원들은 20대 후반이고, 반이 여자다. 신경이 쓰인다. 연애에는 소극적이라도 회사에서는 파워 당당한 팀장일지 모른다. 카리스마가 폭발하거나 뜻밖의 유머 감각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가 선을 봤다는 소문을 듣고 누군가 서둘러 고백할지도 모른다.


점심으로 장어를 먹었다는 카톡 이후로 저녁때까지 연락이 없다. 바람 쐬러 여직원과 둘이 호숫가를 산책하면 큰일이다. 1박 2일은 위험하다. 이십 대한테는 무조건 진다.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 재미있어? 술은 많이 마셨고?

- 고기 구워서 맥주만 조금 마셨어. 이제 들어가서 자야지.

그는 일찍 잔다. 데이트할 땐 단점이었는데 지금은 장점이다. 안심이 된다.


- 일요일에 약속 있어? 저녁 먹을래?

그가 뜻밖의 데이트 신청을 한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낭만적이다. 즉흥적인 약속은 처음이다. 여자의 직감으로 이번 주 일요일이 디데이(D-Day)라는 걸 알 수 있다. 고백하기에 세 번째 만남은 좀 이르고, 다섯 번째는 늦은 감이 있다. 네 번째가 신중해 보이고 적당하다.


일요일 저녁에 삼성역에서 보기로 했다. 그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치마를 입었다. 화장실에서 옷매무시를 가다듬느라 조금 늦었다.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자 그가 벤치에 앉아 있다. 워크숍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초췌해 보인다. 그는 오늘도 무채색이다. 유행에 민감한 남자보다는 패션에 무딘 편이 낫다고 좋게 생각한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이자카야로 그를 따라 들어간다. 신발을 벗고 안쪽의 창가 자리에 앉는다. 칸막이가 있어 독립된 공간이다. 그가 예약한 자리다.


"술 마실 수 있겠어?"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응, 소주 마시자."


그는 소주를 좋아한다. 주량은 한 병 반, 주사는 없다. 취하면 집에 가서 잔다. 나는 소주를 마시면 숙취가 심하다. 몸에서 잘 받지 않는다. 평소에는 거의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를 만날 땐 예외다. 그는 특별하니까.


워크숍은 어땠어? 내 생각은 안 났어? 나는 보고 싶었는데... 이십 대였다면, 서른세 살이었다면, 아니 서른네 살이었다면 이렇게 물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서른여덟 살이다. 그보다 두 살이 많고, 내일모레 마흔이다. 발랄함으로 승부할 나이는 아니다. 그가 그냥 만나자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를 믿어보자.


참치회는 비싼 만큼 맛있다. 어린 잎을 올리고 김에 싸서 먹는다. 서비스로 감자 샐러드가 나온다. 소주가 한 병이 되고 두 병이 된다. 그는 술을 마시면 말수가 없다. 분위기를 잡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잘못 짚은 것 같다. 내가 감을 잃었나 보다. 그렇더라도 내가 먼저 고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떡만둣국의 만두처럼 속이 터져도 기다릴 것이다. 


그가 술값을 계산한다. 나란히 신발을 신고 술집을 나선다. 밖이 어둑하다. 그는 2차를 가지 않는다. 만날 때마다 1차에서 끝났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대로 지하철역까지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헤어지겠지.

다음 주 야구장 데이트를 노려야겠다. 오늘은 틀렸지만, 기회는 반드시 온다. 나의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그가 앞서서 걷는다. 그의 뒤통수를 보며 따라간다. 시골길에서 보따리를 이고 남편을 따라가는 촌부의 모습이 연상된다. 아내는 논두렁에 빠질까 봐 아슬아슬한데 남편은 앞만 보고 걷는 장면. 사귀게 되면 행군이 아니라 나란히 걷는 모습을 상상해도 될까?


한 발짝 앞서가던 그가 불쑥 손을 내민다. 의외다. 계주에서 바통을 받기 직전의 어정쩡한 모양새다. 손을 잡아달라는 건가? 반신반의하며 내 손을 건넨다. 그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손을 잡는다. 그렇게 두어 걸음을 걸었다.


“우리 오늘부터 1일 할까?”


그가 얼굴을 보지 않고 고백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대사다. 걸그룹의 히트곡 가사이기도 하다. 사귀자, 만나볼래?, 널 좋아해, 나 어때?, 가 아니라 오늘부터 1일이라고 한다. 그토록 궁금했던 그의 진심은 이 한 마디로 충분하다. 그의 손을 잡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마주 잡은 우리의 손을 앞뒤로 세차게 흔든다.


사귄 기념으로 한 정거장 거리를 걷는다. 구두를 신어서 발이 아프지만, 운동화를 신은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이제 그의 옆모습을 힐끔거리지 않아도 된다. 연락하고 싶을 때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은 사귀기 전이라 소극적이었을 것이다. 사귀기로 했으니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헤어지기 전 그가 가벼운 포옹을 한다. 내 손가락 끝이 그의 어깨뼈에 닿는다. 등의 감촉이 좋다. 다음에 만나면 키스를 하게 될까?




토요일이다. 사귀고 처음 만나는 날이다. 딸기와 바나나를 갈아 딸바 주스를 만들고, 유부초밥을 만든다. 밥알이 고슬고슬해서 두어 번만 쥐었다 펴면 모양이 금세 잡힌다. 나이키 후드티에 흰 바지를 입고, 새로 산 운동화를 신었다.


잠실 야구장은 인파로 가득하다. 지하철역 계단에서부터 줄을 서서 올라간다. 카톡을 주고받다 답답했는지 그가 전화한다. 발신인에 그의 이름이 뜨는 게 어색하다. 첫 통화다. 그의 전화 목소리가 낯설다.


야구장 안의 편집숍에 들어갔다. 외야석이라 야구 모자가 필수다. 그가 자기가 쓴 것과 같은 시리즈의 야구 모자를 나에게 선물한다. 첫 커플템이다. 너무 저렴하지도, 부담스럽게 비싸지도 않다. 그는 역시 여러모로 적당하다.


1리터짜리 맥주를 사고,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낸다. 드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지만, 그가 감동한 눈치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흘끔거리고, 속도를 맞춰 맥주를 마신다. 그는 오른쪽 얼굴보다 왼쪽 얼굴의 선이 더 날렵하다. 모자를 써서 콧대가 도드라져 보인다.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다.


야구는 접전 끝에 한화가 이겼다. 한화가 몇 년 만에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다. 한화 응원석이 들썩거린다. 그는 기분이 좋아 맥주 2리터를 혼자 다 마신다. 더위와 맥주 때문에 얼굴이 발그레하다.


"천천히 나갈까?"


떠밀리듯 퇴장하는 건 나도 싫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외야석 꼭대기 자리라 전망이 좋다. LG 응원석은 9회부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화 팬들은 승리에 도취하여 응원가를 부른다. 어깨동무하고 삼삼오오 사라진다. 야구장 조명이 하나씩 꺼진다. 연극이 끝난 후의 무대처럼 사위가 고요하다. 지금이다. 지금이 키스하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 다가와야 한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눈을 감는다. 그의 입술이 나비의 날갯짓보다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숙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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