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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Jan 15. 2019

서른여덟, 6개월 만에 결혼하다 #2

연애의 조건

그를 만나기 전의 목표는 연애였다. 나의 비는 시간을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 남자를 오랫동안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작 세 시간의 만남으로는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이에 비례하는 연애 경험이 있다. 내 취향은 내가 잘 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다. 말이 잘 통한다는 것에는 다양한 전제 조건이 포함된다. 지적 수준이 비슷해야 하고, 유머 코드가 맞아야 한다. 비슷한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살아온 결이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한다. 나는 말이 많은 남자를 싫어한다. 수다스러운데 재미까지 없으면 곤란하다. 차라리 말이 없고, 잘 들어주는 남자가 낫다.


고작 한 번 만났지만,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 그는 말수가 적은 대신 재치가 있다. 단어 선택이 적절하다. 강남역에서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산다. 주말엔 가끔 수영을 한다. 연봉은 모르지만 중요하지 않다. 많이 버는 것보다 꾸준히 버는 게 중요하다. 그는 성실해 보인다.


그동안 연애를 고민해본 남자가 몇 명 있었다. 내가 대시하지 않았던 건 결정적인 단점 때문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거나, 친구를 좋아해서 주 5일 술자리가 있었던 남자, 책과 거리가 멀어 하루에 천 개도 안 되는 단어를 쓰는 남자였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결격 사유가 없다는 것이다.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고, 마른 체형이다. 목소리가 낮은 대신 신뢰감이 있고, 고집이 세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말솜씨는 없지만 진중하다. 이 정도 멀쩡한 남자를 만날 기회는 흔치 않다.


두 번째 만남에서 사귀자고 하면 예스라고 대답할 생각이다. 그런데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 첫 만남 후 그가 연락을 하지 않는다. 소극적인 그의 태도가 의아하지만, 오프라인에 강한 성격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는 내가 물어보면 된다.


토요일 오후, 삼성역에서 보기로 했다. 3일 만이다. 첫 번째 만난 날은 밤이었고, 둘 다 정장 차림이었다. 오늘은 낮이고, 캐주얼한 복장이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안녕하세요?”


누군가 코앞에서 인사를 건넨다. 얼굴을 가까이 내밀고 인사하는 모습이 천진하다. 그다. 먼저 알아봐 줘서 고맙다. 다시 보니 눈매가 선하다. 맨 뒷자리의 테이블석에 앉았다. 그가 소개팅 다음날에 영화표를 예매했다. 150분짜리 긴 영화다. 운동을 하고 왔더니 피곤하고 여기저기 쑤신다. 몰래 하품을 하고 슬쩍슬쩍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배가 고프다.


그가 저녁 장소를 예약했다. 레스토랑은 오랜만이다. 스파게티와 라자냐, 맥주 두 잔을 주문한다. 다이어트 중이지만 고칼로리 음식을 먹는다. 지금은 데이트 중이니까 괜찮다. 빈속에 맥주가 들어가니 찌르르한 기분이 느껴진다. 알싸하다. 친해지려면 적당한 취기가 필요하다. 2차는 횟집에 갔다. 광어회와 소주를 시켰다. 올해 들어 처음 마시는 소주다. 그의 속도에 맞춰 원샷을 했다. 취할 작정이다.


“쇼핑 좋아하세요?”


그가 물었고, 나는 멈칫했다. 평범하지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저의를 파악해야 한다. 원하는 대답이 뭘까? 나의 소비 스타일을 알아보려고 그러는 걸까? 주로 어디서 쇼핑하냐고 물어본다면 롯데백화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강남역 지하상가라고 해야 할까? 나의 경제력을 내세워야 할지, 검소한 소비 스타일을 부각해야 할지 고민된다.


“네, 쇼핑 좋아하죠.”

“다음 주 토요일에 아웃렛에 쇼핑하러 갈까요?”


아웃렛이면 최소한 경기도다. 두 번째 데이트에 교외로 나가자는 건 좋은 징조다. 나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하다. 어쩌면 모자나 티셔츠 같은 걸 사주면서 사귀자고 할지도 모른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소주를 한 병 더 시키려는데 그가 흘끗 시계를 본다.


“열 시네요. 갈까요?”


아쉽다. 취하면 물어보려고 아껴둔 질문들을 꺼내지 못했다. 마지막 연애는 언제인지, 내 첫인상은 어땠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수요일은 첫 만남이라 일찍 들어간 줄 알았는데, 토요일에도 10시에 일어나자고 한다. 일요일에 다른 일정이 있는 걸까? 나는 택시를 탈 각오가 되어 있지만, 그는 아니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지하철역에서 헤어졌다.




만난 지 3일이 지났다. 그에게서 연락이 없다. 토요일 데이트를 되짚어본다. 특별히 실수한 건 없어 보인다. 그가 영화를 예매해서 내가 팝콘을 샀고, 그가 저녁을 사서 내가 2차를 계산했다. 그는 왜 연락하지 않는 걸까? 데이트 신청은 두 번 다 그가 했으니 연락은 내가 먼저 해야 하는 걸까? 두세 시간마다 연락이 오는 건 번거롭고 귀찮다. 그래도 3일은 심하다.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 소나기가 오네요. 우산 가져왔어요?

- 강남역은 안 와요. 거기만 오나 봐요.

- 이번 주 토요일에 비 오면 어떻게 해요?

- 비가 내려도 가야죠.


마음이 바뀐 것 같지는 않다. 토요일 데이트 약속은 그대로다. 내가 너무 조급했다. 우리는 혼자였던 시간이 길다. 서로에게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일요일 아침이다. 긴 일주일이었다. 엄마가 고데기로 머리를 말아주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이다. 모녀간의 의기투합이다. 우리 회사 주차장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렌터카를 빌리겠다고 해서 내가 회사차를 쓰자고 했다. 운전병 출신이라고 해서 믿고 핸들을 맡겼다.


우리는 자유로를 타고 달렸다. 그는 운전을 잘하지만, 말이 없다. 쇼핑할 때도 조용하다. 마음껏 둘러보라는데 불편하다. 옷보다 그에게 신경이 쓰인다. 두 번째 데이트에 쇼핑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빨리 쇼핑을 끝내기로 마음먹는다. 너무 비싸거나 너무 싼 건 제외하고, 적당한 티셔츠와 신발을 고르고 쇼핑몰을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과 데칼코마니다. 세상 지루하다. 초면만 아니면 조수석에서 잠들 뻔했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적당한 술집에 들어갔다. 돼지고기 숙주볶음과 소주를 시켰다. 운전대를 놓은 그는 한결 편해 보인다.


“우리 말 놓을까요?”


소주를 몇 잔 마시고 그가 말한다. 말을 놓자는 건 계속 연락하자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는 말이 많지 않지만, 포인트를 잘 짚는다. 반말과 존댓말을 섞으며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다가 말을 놓았다. 친근감이 느껴지고 편하다. 묘하게 긴장이 풀린다.


“야구 좋아해?”


쇼핑에 이어 이번에는 야구다. 그의 질문은 대답을 고민하게 만든다. 솔직하게 안 좋아한다고 말할지,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할지 머리를 굴린다.


“응, 야구 좋아하지. 난 LG 팬이야.”


그의 호감을 얻는 쪽으로 대답한다. 선의의 거짓말이다. 사실은 LG에 어떤 선수가 있는지도 모른다. 야구를 좋아한다는 내 대답에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알고 보니 그는 한화 광팬이다. 그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LG와 한화의 경기 일정을 검색한다. 2주 뒤 잠실야구장에서 만나자고 한다. 쇼핑과 드라이브도 어색했는데, 야구 관람은 얼마나 어색할지 걱정된다. 그는 날짜를 골라서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한다. 헤어지기 전에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우리 2주 뒤에 보는 거지?”

“응, 2주 뒤에 봐.”


그가 해맑게 대답한다. 우리 집은 방배역이고, 그의 회사는 강남역이다. 우리 회사는 잠실새내역이고, 그의 집은 오금역이다. 20분 이내의 가까운 거리다. 퇴근할 때 내가 강남역으로 갈 수도 있고, 그가 잠실로 올 수도 있다. 데이트 초반에는 짧게라도 자주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자주 만나야 호감이 생긴다. 평일에 만나서 저녁을 먹자고 할까 고민하지만 참는다. 서른여섯 살이면 연애에 대한 기본 지식은 갖추고 있을 나이다. 그가 내 질문의 행간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는 연애 고수일까, 연애 고자일까?

우리는 2주 뒤에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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