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하러 가자는 그 말
키스 데이 이후로 스킨십에 진전이 없다. 우리는 밝은 곳으로만 다녔고, 그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지 않았다. 개점휴업 상태다. 키스하고 싶을 때마다 한강에 가자고 할 수는 없다. 한 번은 압구정에 있는 바에 갔다. 지하철역에서 멀고, 시간이 애매해서 택시를 탔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그가 다정하게 말한다. 택시를 타는 것도,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처음이다. 뒷좌석에서 그의 옆에 붙어 앉았다. 사귄 지 50일을 넘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 쪽으로 내 얼굴을 가져갔다. 가볍게 뽀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화들짝 놀라며 나한테서 떨어졌다. 그가 나지막이 말한다.
“블랙박스가 보고 있어.”
잠시 멍해진다. 이런 거절은 처음이다. 범죄자도 아닌데 블랙박스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황당하지만 기회가 남았으니 참는다. 우리 집은 여섯 세대가 사는 빌라다. 담장이 빌라를 둘러싸고 있고, 뒤쪽으로 장독대가 있다. 장독대 쪽으로는 인적이 드물다. 키스하려고 진작부터 봐 둔 장소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아저씨와 마주치지만 않으면 된다.
택시가 집 앞 큰길에 도착했다. 그가 택시에서 같이 내린다.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 편의점 지나서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서 첫 번째 집이야, 라고 한다. 걸어서 2분도 안 되는 짧은 거리다.
“조심해서 들어가. 도착해서 전화할게.”
내 귀를 의심한다. 여기까지 와서 간다고? 인사만 하고 다시 간다고?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두어 발짝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본다. 그가 제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이건 집에 데려다준 것도 아니고, 안 데려다준 것도 아니다. 터덜터덜 귀가한다.
무언가를 터득하고 익히기 위해서는 반복이 중요하다. “엄마”라는 단어를 발음하기까지 몇 천 번의 옹알이가 필요했을까? 잘 걷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넘어졌을까? 공자는 논어에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라고 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스킨십도 마찬가지다. 한 번 했다고 끝이 아니다. 만날 때마다 연습하고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학습 열의가 없어 보인다.
“강원도 양양에 서핑하러 갈래?”
사귀고 두 달이 지날 무렵, 그가 강원도에 가자고 했다. 그를 바른길로 인도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1박 2일로?"
믿기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키스도 몇 번 안 해보고, 자취방에 초대도 안 하면서 외박을 하자고? 구구단을 배우자마자 인수분해를 하겠다는 건가? 그의 뇌 구조가 궁금하다. 연애를 해 보긴 한 걸까? 혹시 책으로 연애를 배운 건 아닐까?
여러 의문을 뒤로하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연인이라면 여행은 필수 코스다. 데이트는 준비된 순간만을 보여줄 수 있지만, 여행은 서로의 민낯을 드러낸다. 주말에 누구한테 연락이 오는지, 잠버릇은 어떤지, 아침에 화장실은 몇 분을 사용하는지 등을 관찰할 수 있다. 빠르게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다. 2주 뒤에 떠나기로 했다.
그의 카톡 프로필은 파도를 타는 서퍼다. 인터넷 이미지인 줄 알았더니 작년에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운동과는 담을 쌓은 줄 알았는데 의외다. 나는 요가원에서는 에이스지만, 물과는 거리가 멀다.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 게 부담스럽다. 그나마 서핑은 전신 슈트라 다행이다.
여행 일주일 전에 PPT 파일을 받았다. 여행 계획을 시간대별로 정리한 파일이다. 그가 마케팅 팀장인 것을 잊고 있었다. 그는 제안서, 기획서 등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매일 다룬다. 적절한 이미지와 깔끔한 편집의 고퀄리티 일정표다. 그에게 여행은 계획이다.
나에게 여행은 다이어트다. 전신 슈트를 입어도 몸매는 드러난다. 우리가 함께할 밤도 생각해야 한다. 몸매 관리가 시급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두 시간씩 운동했다. 데이트가 있는 날 외에는 저녁을 거르거나 샐러드를 먹었다. 2주 동안 가슴을 크게 만들 수는 없지만, 아랫배를 납작하게 만들 수는 있다.
7월이 되었다. 봄에 이어 우리가 함께하는 두 번째 계절이다. 이른 오후에 양양 바닷가에 도착했다. 하늘은 맑지만, 파도가 높다. 나들이에 좋은 날씨와 서핑에 좋은 날씨는 다르다. 장비 대여소에서 위험하다고 했다. 내일을 기약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대게 먹을까?”
강원도는 대게다. 수산 시장에는 대게집이 즐비하다. 밑반찬 없이 대게로만 승부하는 허름한 가게에 들어갔다. 서울과는 달리 인테리어라고 부를 만한 집기나 소품이 없다. 대신 탁 트인 바다가 있다. 오션 뷰에 대게, 이거면 됐다. 강원도 대게는 편의점에서 파는 원 플러스 원 게맛살과는 부드러움이 다르다. 게딱지에 볶음밥까지 싹싹 비벼 먹었다.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입에 물으니 여행의 반을 즐긴 것 같다.
오후 4시. 낙산비치호텔에 체크인을 한다. 방이 크고 고급스럽다. 통유리로 바다가 보인다. 서핑을 하기에는 위협적이던 파도가 방에서 보니 낭만적이다. 그가 침대에 눕는다.
“한 시간만 잘까?”
그는 장거리 운전에 지친 것 같다. 나도 그의 옆에 눕는다.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니 오후 7시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차를 몰고 시내까지 가면 술을 마실 수가 없다. 호텔 주변의 먹자 골목으로 간다. 호객을 하지 않는 식당에 들어간다. 해물탕과 강원도 소주를 주문한다. 도수가 꽤 높아서 취기가 금방 오른다. 2차는 호텔에서 하기로 했다. 집에서부터 와인과 치즈, 육포, 망고 등을 준비해왔다. 분위기를 내려고 한 것도 있지만, 과일을 챙겨 먹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에게 잘해주고 싶다.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다. 오늘을 위해 실내용 긴 원피스를 샀다. 창가 테이블에 술상을 차린다. 나란히 앉아 바다를 보며 음악을 듣는다. 그가 90년대 댄스곡을 선별해왔다. SES, 터보, 코요테의 히트송이 무작위로 재생된다. 그가 노래를 따라 부른다. 덩달아 신이 난다. 흥만큼 와인 한 병이 빠르게 바닥난다. 맥주를 한 캔씩 더 마시고 자리를 정리했다.
밤 11시. 그와 단둘이 호텔에 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긴장된다.
“우리 오늘은 잠만 잘까? 내일 아침에 일출 보고 하자.”
그가 반쯤 감긴 눈으로 웅얼거린다. 침대에 쓰러지더니 2분도 되지 않아 코를 곤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허망하다. 이러려고 소주, 와인, 맥주 3종 세트를 마신 건가? 그는 세상 편하게 자지만, 나는 말똥말똥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는데 긴장이 안 되나? 서운하다. 뒤척이다가 선잠을 잤다.
새벽 5시 반.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일출 시각이다. 그를 깨웠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봤다. 크고 선명한 해가 떠오른다. 혼자서 일출을 보니 마음이 외롭다. 그는 9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아, 잘 잤다. 역시 주말에는 10시간은 자 줘야 해. 일출 같이 못 봐서 미안. 빨리 씻고 나올게.”
그는 어제 한 약속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가 씻는 동안 화를 내야 할지 서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낙산사를 걸었다. 낙산사는 절경이다. 이런 곳에서 아침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여행이다. 하지만 즐길 기분이 아니다. 숙취 때문에 속이 좋지 않다. 말수가 줄었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한다.
간단하게 해장을 하고 양양 해수욕장에 갔다. 파도가 어제보다는 낮지만, 초보자에게는 높다. 서핑 보드와 전신 슈트를 대여해 바다로 전진한다. 파도가 거세다. 용기를 내어 허리 높이까지 들어간다. 짠물만 먹고 물러선다. 보드를 두 개 빌릴 필요가 없었다. 하나면 충분하다. 몇 번을 시도하다가 깔끔하게 포기한다. 모래사장에 앉아 고수들의 파도타기를 구경한다.
"차 막히겠다. 올라갈까?"
그가 시계를 보며 서두른다. 차가 막히면 운전하는 그도, 조수석의 나도 힘들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라디오를 들었다. 양양에서 서울까지는 긴 터널의 연속이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신호가 끊기거나 잡음이 심하다. 끄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가 고집스럽게 '붐붐파워'에 주파수를 맞춘다. 졸음을 쫓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짜증이 난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반납하고 헤어졌다. 무난한 여행이다. 하지만 중요한 게 빠졌다. 나는 서른여덟이고, 그는 서른여섯이다. 그는 우리의 문제점을 알고 있는 걸까? 서핑하러 가자는 그 말은 정말 서핑을 하러 가자는 뜻이었을까?
머릿속이 시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