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보다 허니문 먼저
나에겐 네 명의 고모가 있다. 강원도에 사는 1호 고모, 원지동에 사는 2호 고모, 서초동에 사는 3, 4호 고모다. 3, 4호 고모의 집은 우리 집에서 반경 500m 이내다. 평소에도 왕래가 잦아 달걀 한 판도 나눠 먹는 사이다. 서초동은 일종의 실버타운이다. 그날은 강원도 고모가 올라와서 3호 고모집에 모두 모여 있었다.
“집 샀다며? 축하해!”
들어서자마자 축하 세례를 받았다. 열 명이 넘는 친척이 거실에 모여 있다. 나는 금의환향한 것처럼 인파에 둘러싸여 환영을 받았다.
“내일 유럽 간다며. 남자 친구랑 가는 거니?”
“웨딩 촬영하고 온대.”
“결혼식은 언제 하니?”
“그냥 올해 안에 해.”
나 없이도 내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된다. 엄마가 정보를 사전에 유출했고, 고모들의 넘겨짚는 속도는 엄마 못지않다. 나의 내공으로는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다. 4호 고모만 말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안경을 추어올리며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세고 있다.
“2018년 11월 11일 11시가 좋겠네.”
4호 고모는 휴대폰 달력으로 길일을 택하고 있었다. 고모는 대학 병원에서 30년간 간호사로 근무했다. 생로병사를 분 단위로 접해서 그런지 신기가 있다. 달걀 파동이 일어나기 전에 유정란을 1년 선 계약했고, 고모가 달러를 사면 반드시 올랐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설명하지 못할 일들을 예견했다. 4호 고모의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농담처럼 웃어넘겼지만, 고모가 골라준 날에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여행 1일차. 전야제의 여파로 짐을 다 못 싸고 잤다. 아침에 부랴부랴 짐을 싸고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공항버스를 타자마자 예식장을 검색했다. 예식장 선택 기준은 두 가지다. 서초동 근처일 것, 뷔페 말고 한상 차림일 것.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예식장에 카톡 상담을 남긴다. 몸은 공항으로 가는데 마음은 서울을 떠나지 못한다. 9월 말까지 중도금을 마련해야 하고, 리모델링 업체에서 견적과 공사 일정을 받아야 한다.
분명 유럽 여행이 먼저였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인가 순서가 뒤바뀌었다. 여행이 사치라고 느껴진다. 할 수만 있다면 취소하고 싶다. 하지만 여행을 위해 돈과 시간을 만드느라 둘 다 보이지 않게 노력했다. 유럽 여행은 드문 기회다. 생각을 바꾼다. 결혼이 현실이라면 그 현실을 이겨낼 만큼의 낭만이 필요하다. 우리가 함께할 열흘은 힘들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낭만은 사치가 아니다.
인천 공항에서 그를 만났다. 공항에서 만나니 더 반갑다. 여행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을 그와 함께 겪을 것이다. 비행기가 곧 이륙했다. 그가 도시마다 숙소를 예약하고, 왕복 항공권과 프랑스 기차표를 예매했다. 가고 싶은 곳과 관광지 정보는 수집했지만, 날짜별로 동선은 정하지 않았다. 여행 세부 일정은 이제 짜야 한다.
"유럽 가서 꼭 하고 싶은 거 있어?"
“도시마다 한 번씩은 해야지.”
그가 윙크하며 뜻밖의 19금 멘트를 날린다. 엉뚱하지만 귀엽다. 열한 시간의 지루한 비행을 예상했지만, 그와 있으니 시간이 잘 간다. 그는 좋은 말동무다. 그가 내 옆에 있는 게 편하게 느껴진다.
네덜란드 스히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하를렘 역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려서 캐리어를 끈다. 나는 장거리 비행에 지쳤고, 그는 구글 지도를 보느라 말이 없다. 캐리어의 무게가 내 다리보다 무겁게 느껴질 때쯤 불이 환히 켜진 집을 발견한다. 노크를 하자 집주인이 맞아준다. 테이블에는 웰컴 와인이 있다. 1층에 거실과 부엌, 샤워실이 있고 지하에 침실과 화장실이 있는 복층 구조다. 간척으로 만들어진 네덜란드 특유의 주택 구조다.
작은 문제가 있다. 샤워실의 전구가 나갔다. 집주인이 2유로를 주며 내일 교체하라고 했다. 그때는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변기 물이 안 내려가는 것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니까. 허기를 면하는 게 더 중요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즉석밥에 육개장으로 저녁을 먹었다. 잠이 쏟아진다. 한국 시각으로 새벽 6시다. 지하 침실은 불을 끄면 완벽한 어둠이다.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를 닮아가고 있다.
여행 2일차. 새벽에 눈이 떠졌다. 시차에 적응하려면 사나흘은 필요할 것 같다. 샤워실 전구가 나가서 문을 열어놓고 샤워를 해야 한다. 느긋하게 씻고 그를 깨워서 아침 산책을 했다. 네덜란드는 운하와 풍차의 나라다. 운하를 따라 걷고, 풍차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첫 인증사진이다. 화장을 안 한 무방비 상태다. 이 사진을 그가 부모님께 보낸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왜 그 사진이었냐고 하니까 풍차가 예뻐서, 라고 한다.
암스테르담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암스테르담 시내는 만만하다. 제주도 서귀포처럼 관광 명소가 옹기종기 붙어있다. 섹스 박물관과 왕궁, 하이네켄 박물관을 차례대로 돌았다. 하이네켄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맥주다. 시음한 맥주 때문인지 시차 때문인지 오후 5시가 되니 졸리다. 운하 투어를 할 때 눈이 반쯤 감긴다. 집에 가는 길에 전구를 사려고 했지만, 동네 전구 가게가 일찍 문을 닫았다. 둘째 날 밤도 어둠 속에서 샤워를 해야 했다.
여행 3일차. 네덜란드는 간척지로 조성된 나라라 땅이 귀하다. 좁은 땅에 집이 촘촘히 붙어 있다. 사생활 보호가 잘 안 되는 수준을 넘어 오픈 하우스에 가깝다. 사방이 창문이라 얼결에 행인들과 눈인사를 했다.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아침 풍경이다.
오늘은 잔세스칸스 버스 투어를 예약했다. 풍차 마을에서 셀프 웨딩 촬영을 하기로 한 날이다. 꽃 시장에 들러서 튤립과 작약을 샀다. 신선한 생화를 사진에 담고 싶다. 나는 흰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그는 정장을 입고 나비넥타이에 멜빵을 했다. 꼬마 신랑 같다.
유럽 사람들은 친절하다. 풍차 앞에서 꽃을 들고 있으면 먼저 다가온다. 셀카봉이 필요 없다. 한 독일 아저씨가 본인도 여기서 웨딩 사진을 찍었다며 행복하게 살라고 한다. 20대의 발랄한 영국 아가씨가 키스하라며 부추긴다. 우리가 걸어가면 단체 관광객이 기다린 듯이 손뼉을 친다. 맘마미아의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된 기분이다. 미리 걷는 버진 로드다.
“우리 10년 뒤에 여기서 리마인드 웨딩 하자.”
유럽인의 관심과 오지랖에 감동한 그가 말한다. 십 년 뒤면 그는 마흔여섯, 나는 마흔여덟 살이다. 우리는 지금만큼 건강하고, 지금보다 사랑하고 있을까?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니 오후 5시다. 숙소 근처의 전구 가게가 문을 닫을 시간이다. 내일이면 떠나니까 하루만 불편함을 참으면 된다.
"나 아까 봐 둔 데 있어. 오로라 전구 가게. 이름 너무 근사하지?”
그가 전구에 집착한다. 뜻밖이다. 가게 직원이 10유로짜리 고급 전구를 추천한다. 집주인한테 2유로를 받았으니 8유로 손해다. 나는 망설였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숙소로 오자마자 그가 전구를 갈아 끼운다. 샤워실에 불이 들어오는 것에 기뻐한다. 그러더니 안 씻고 바로 잔다.
여행 4일차. 그가 샤워를 한다. 전구가 가져다준 문명의 혜택에 즐거워한다. 우리가 떠난 뒤에도 전구는 일 년 넘게 오로라처럼 빛날 것이다. 암스테르담을 떠나 니스로 향했다. 사진 촬영에 쓰려고 어제 산 꽃을 챙겼다. 출국 심사대 직원이 꽃을 든 그를 ‘로맨틱 가이’라며 치켜세운다. 가방에 마약이 들어있대도 무사통과를 시켜줄 것처럼 로맨스에 관대하다.
셀프 촬영의 한계를 느낀 우리는 프랑스 니스에서 사진작가를 섭외했다. 로렌스와 리처드 부부가 우리를 반긴다. 로렌스가 사진작가고, 리처드가 보조다. 로렌스의 지시에 남편이 따른다.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구시가지에서 두 시간 동안 웨딩 촬영을 했다. 현지 작가라 촬영 포인트를 잘 안다. 그와 키스를 하고, 그가 나를 안는다. 그가 무릎을 꿇고 꽃을 건넨다. AI(인공지능)처럼 그는 명령어를 충실히 수행한다. 덕분에 촬영이 수월하게 끝났다. 전문 작가의 사진이 기대된다.
여행 5일차. 생폴 드 방스를 갔다. 샤갈의 무덤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러 대의 버스가 줄지어 도착하고, 관광객들이 계속해서 몰려든다. 이곳이 명소 중의 명소라는 뜻이다. ‘짐이 곧 국가’였던 루이 14세처럼 ‘골목이 곧 유럽’이다. 우리는 쉬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식전 동영상에는 사진이 많이 필요하다. 짧은 연애 기간을 유럽 여행으로 만회해야 한다.
여행 6일차. 니스를 떠나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했다. 계속되는 이동에 지친다. 프랑스 남부를 언제 또 와보겠냐며 욕심을 낸 게 화근이다. 홍삼을 먹어도 피곤하다. 나는 여전히 시차 부적응자다. 오후 6시에 숙소로 복귀했다.
"내가 스테이크를 구울 테니까 네가 빨래해."
주방은 내가 책임지고, 그에게 빨래를 일임한다. 그가 세탁기 버튼을 눌러보다가 나에게 쪼르르 온다.
“세탁기가 안 돌아가.”
"설명서 읽어 봤어?"
그는 한번 해보고 안 되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찬 물로 맞춰놓고 해야지. 여기 설명서에 쓰여 있잖아."
그가 굉장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의 진짜 실력은 세탁기가 돌아간 후에 발휘되었다. 현역 군인과도 같은 칼각으로 양말과 속옷의 간격을 일정하게 맞춘다. 빨래가 줄지어 연병장을 돌 것 같다. 그는 빨래 천재다.
"훌륭해. 결혼하면 빨래는 네가 하기로 하자.”
그렇게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배분했다. 결혼 후 해가 바뀐 지금까지도 나는 세탁기를 돌려본 적이 없다.
여행 7일차. 엑상프로방스에서 가이드 분수 투어를 했다. 더워서 분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는다. 고추장과 김치가 없으니 느끼하다. 가져온 햇반이 떨어졌다. 국물이 먹고 싶다. 시골 마을이라 흔한 중식당도 보이지 않는다. 파리에 가면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중식과 한식이 너무 먹고 싶다.
여행 8일차. 테제베(TGV)를 타고 파리로 출발했다. 일등석이다. 여행 막바지에 체력이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사전에 계획된 사치다. 세 시간 동안 다리를 쭉 뻗고 잤다. 파리의 숙소 옆에서 중식당을 발견했다. 그와 기쁨의 눈빛을 교환한다. 볶음밥과 볶음면, 닭튀김 등을 먹었다. 이제야 살 것 같다.
힘을 내서 시내를 돌아다닌다. 파리의 화장실은 유료다. 덕분에 센강은 지린내가 진동한다. 파리 하면 냄새가 먼저 떠오를 정도다. 빵을 훔치는 현대판 장발장도 목격했다. 파리는 여러 의미로 살아 있었다. 우리는 퐁네프의 연인들처럼 키스를 하고, 샹젤리제 거리로 갔다. 미리 검색해둔 한식당을 찾았다. 순두부찌개와 제육볶음이 오로라 전구처럼 우리의 영혼을 밝혀준다. 바게트는 쳐다보기도 싫다.
여행 9일차. 오늘 하루는 베르사유 궁전에 올인하기로 했다. 초등학교 때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열 번 넘게 읽었다. 어른이 되면 꼭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긴 줄을 통과해서 궁전에 들어갔다. 제일 인기있는 거울의 방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이 방에서 예쁜 드레스를 입고 거울을 들여다봤을 앙투아네트를 상상해본다. 궁전 투어를 끝내고 베르사유 정원에서 편의점 도시락과 음료를 꺼냈다. 오렌지 주스를 따자 벌 한 마리가 나타난다. 손으로 휘휘 내쫓고 한 모금을 마신다. 몇 초 뒤에 세 마리가 되고, 10초 뒤에는 열 마리가 된다. 혼비백산해서 뛰기 시작했다. 오렌지 주스를 던져버리면 그만이지만 배가 고프다. 벌에게 양보할 수 없다. 전력 질주 후, 도둑 점심을 먹었다. 기진맥진한 채로 궁전을 빠져나왔다.
“더 가고 싶은 곳 있어?”
“아니, 그냥 슈퍼 들렀다가 숙소로 가자.”
오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졸리다. 여행 마지막 날까지 시차 적응에 실패했다. 이제 마지막 힘으로 내일 샤를 드골 공항까지만 가면 된다. 여행이 끝나는 게 아쉽지만, 서울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여행 10일차. 남은 유로를 털어 샌드위치와 콜라를 샀다. 공항 구석에서 휴대폰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영화를 본다. 베르사유 궁전의 여운을 느낀다. 동영상으로 데이터 사치를 누렸다. 셀프 체크인을 하다가 실수로 좌석을 자동으로 배정받았다. 열흘간 붙어있다가 그와 처음으로 떨어져 앉았다. 혼자서 두 번의 기내식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