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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거 가스라이팅이야.

나도 알아.

by 서대문구점

나는 그 아이에게 참으로 헌신적이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밀린 설거지와 청소, 다 떨어진 고양이의 사료 그릇과 물그릇을 닦아주고 화장실 청소를 해주며 품을 들였고, 그 아이와 고양이게 밥을 사 먹이며 전기요금을 내주었고, 종량제 봉투와 음식물 쓰레기봉투까지 채우면서 돈을 들였다.


우리는 3년 전 늦가을,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어 마라탕을 먹으며 서로를 알아갔다. 중국사람이라면 왠지 마라탕은 기본적으로 익숙한 음식이지 않을까 해서. 가장 무난한 메뉴를 고르다가 선택한 메뉴였다. 짜장면은 한식이지 않은가... 하지만 계획했던 마라탕 가게는 기다리는 손님으로 가득 차있어 자리를 옮겨야만 했고, 급하게 근처의 양꼬치 가게가 있어 어떠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양꼬치가 더 좋다고 했다. 양꼬치 가게로 자리를 옮겨 주문을 마쳤다. 칭다오 맥주는 빼놓지 않았는데, 그 아이는 청도에서 먹으면 더 맛있다고 했다. 현지인에게 들어서 인지 어쩐지 더욱 신뢰가 갔다. 그리고 곧 뜨끈한 숯불 입장. 숯불의 화끈한 열기였을까, 그 아이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내 명치에 겨우 이마가 닿을 것 같은 아담한 아이가 볼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니 더욱 귀여워 보였다.


음식과 메뉴를 나눠먹으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아이는 한국이 좋다는 이유로 유학길에 올랐으며, 고향 충칭은 너무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했다.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으며 이름은 탕탕. 설탕의 탕이라고. 중국에서는 동물의 이름을 지을 때 주로 먹을 것으로 이름을 짓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탕탕. 귀여운 이름이었다. 씩씩하게 한국어를 구사했기에 중국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또박또박 단어를 고르며 말하는 그 아이의 눈은 한 겨울의 보름달처럼 빛났다.


그 아이는 한국에서의 첫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혈혈단신의 몸으로 자신만큼 커다란 트렁크 두 개를 양손으로 끌며, 창천동 언덕길을 올라 룸메이트가 있는 첫 자취방에 도착했고, 한국어를 하나도 할 줄 몰라 편의점에서 물 하나 사기 어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힘들었어도 모든 게 낯선 만큼 설레고 즐거웠다고, 앞으로의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나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 아이는 분명 밝고 활기찼으며 내면이 강한 아이였다. 나는 밝고 씩씩한 아이의 모습에 끌려 고백했고, 곧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서로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알아가면서.


그로부터 1년이 지났을까, 그 아이는 점차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왔기에 본능적인 불안감이 떠밀려왔을까, 어학당과 대학교에서 인연을 맺었던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자 자신도 곧 떠날 것을 예감한 불안감이었을까, 그 아이는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내동댕이쳤다. 새벽 5시가 되도록 휴대폰을 놓지 않고 게임과 틱톡 영상을 봤고, 다음날은 오후 3시가 되어 일어나 늦은 점심을 먹었다. 몇 번이나 그 아이의 삶의 루틴을 건강하게 돌려놓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사랑해주어야 할 사람이 왜 혼을 내냐'는 붕괴된 한 인간의 절규였다.


이 아이는 분명 의존적인 아이가 아니었는데, 내가 알던 그 아이는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나는 방향 감각이 좋지 않아 자주 길을 헤매는 편인데, 그 아이는 바보 같이 길을 찾지 못하는 나를 탓하지 않고 내 손목을 틀어잡고 바른 길을 함께 찾아주던 아이였다. 하지만 어느새 길을 찾지 못하는 나를 경멸하듯 바라보며 너와는 답답해서 나오기가 싫다고, 집에서만 데이트하자고 나를 쏘아붙이는 사람이 되었다. 또 늦은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나에게 맛있는 고향 음식을 해주겠다며 인터넷 레시피를 따라 해 밥을 차려주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네가 늦게 오는 바람에 저녁도 못 먹어서 어지럽다며 말폭탄을 던지는 악마가 되어버렸다.


그 아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던지는 무차별 폭격 속에서도 나는 그 아이를 이해해주려고 노력했다. 발칙한 애교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부모님은 중국인이었고, 그곳은 현재 아이를 한 명밖에 낳을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강제력을 동원하고 있는 곳이다. 게다가 고위 공무원 집안의 하나뿐인 딸이었기에 집안의 모든 관심을 독식했으며 동시에 부담감도 함께 떠 앉고 살았다. 그리고 무뚝뚝하고 건조한 집안의 분위기 탓에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해본 적도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어렵게 정을 붙였던 친구들이 하나 둘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그 아이 주변에는 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나는 가족이었고, 보호자였으며 세계였다고 나는 이해했다. 그래, 세계는 세계에 속한 생물을 이해해 줘야지, 내 그릇을 더 넓혀야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헤어지고 난 뒤 두 달째, 그 아이를 이해해주는 것이 삶의 전부인냥 굴었던 나는, 불타버려 폐허가 된 마음을 속절 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 사이에 내 생일이 지나갔고, 그 아이의 생일도 지나갔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월드컵에서 기적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며 16강에 오르기도 하였다. 메시는 끝내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회사에서는 몇 번의 프로젝트를 마쳤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오늘도 도시는 나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불빛만 깜빡이고 있다. 켜짐과 꺼짐 뿐인 불빛처럼 나도 버튼 한번에 무언가를 켜거나 끄고 싶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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