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
내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결혼 소식을 직접 듣는다는 것은 나의 과거가 오롯이 추억으로 박제되는 경험이다. 그 순간 나는 그녀와 걸었던 모든 길을 다시 한 번 복기하는 바둑기사가 된다. 그녀와 내가 걸었던 모든 발자국에 색을 입힌다면, 서울 어디든, 그 자국들을 밟지 않고 돌아다니기 힘들 것이다. 아마도 홍대 대부분의 골목엔 우리 둘의 발자국으로 가득할 것이다.
합정 골목 빈티지한 카페에서 맥주 두병을 시켜놓고 네 시간이나 떠들던 그날의 오후 햇살은 아마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미영처럼.
“아, 축하해. 결혼......하는구나.”
단어와 단어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했고, 그 공백들이 진짜 내가 할 말들을 대변했다. 때로는 공백이 더 진실하다는 것을 난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응. 고마워,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만났어.”
미영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카페에서 핸드폰을 도난당했고, 남편 될 사람은 도망가던 범인을 끝까지 따라가서 격렬한 몸싸움 끝에 되찾아줬다. 그는 압구정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잘나가는 남자라고 했다. 나보다 연하라는 점에서 나는 새삼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잘됐다. 너한텐 그런 사람이 어울려.”
“아니, 잘 어울린다는 말 안 믿어”
뭘 좀 시키자는 그녀의 말에 메뉴판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늘 먹던 자몽빙수는 먹으면 안될 것 같아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진동 벨은 금방 울렸다. 계산은 내가, 픽업은 그녀가, 3년이 지났어도 우리에겐 여전히 무언의 룰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나를 흘깃 쳐다보면서 무언가 말을 주저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와 같이, 조심스러운 것이다. 남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 속에 우리는 앉아있는 것이니까.
그녀가 잔을 들 때, 옷깃이 내려가며 손목이 드러났다. 삼년 하고도 이년 전 그녀와 내가 즉흥적으로 겨울바다에 가던 날. 다친 그녀의 손목엔 아직도 흉터가 남아있었다.
“그 흉터, 아직도 있네.”
무리하게 해안가의 암벽을 걷다가 넘어지면서 찢어진 왼쪽 손목엔 3센티미터가 넘는 흉터를 남겼다. 그런 일이 처음이었던 나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 검붉은 피를 다시 담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녀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파도가 칠 때마다 해안가의 거칠은 암반 위에서 우물쭈물하고만 있었다.
“응? 흉터?”
그녀는 왼 손목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여분의 말을 내뱉었다.
“여기에 왜 흉터가 있지?”
경포대에서 난 상처가 분명하다. 손목에서 피를 쏟는 그녀를 보며 나는 하염없이 눈물 흘렸고, 119번호 조차 까먹었던 그날을 잊을 수는 없다.
“무슨 소리야, 우리 강릉에서... 그 겨울...”
“겨울? 강릉?”
미영이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눈을 뜨며 말했다.
“우리 갔던 겨울바다에서,”
“오빠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난 태어나서 겨울바다 가본 적...”
그녀와 나의 눈이 참 오랜만에 정확히 마주쳤다.
“한 번도 없어.”
그녀가 말을 마쳤고, 나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