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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Dec 11. 2018

콜센터에서 발음이란?

- 2011년 콜센터 아르바이트

L은 콜센터와 성격이 별로 맞지 않는 친구였다. 평소에는 순한데 작은 계기에도 다혈질끼가 드러나는 통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끔 어려워하는 쪽이 있었다. 한번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를 학회장형이 채갔다면서, 앞에 있는 나무 의자를 냅다 발로 차버렸는데 엄지발가락이 어떻게 다쳤는지 2주를 절면서 다닌 적도 있었다. 비슷한 몇 가지 사건이 있고나서 동기들 사이에서는 L이 분노조절장애인 것은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는데, 정작 덩치 크고 성질 더러운 선배 앞에서는 수치나 모욕도 잘 견디는 편이었다. 쪼끔 비겁한 다혈질인가보다하고 말았다.


아무튼 나랑 L은 별 트러블도 없이 꽤 친했다. 그래서 콜센터 아르바이트도 같이 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그럭저럭 잘 적응한 편이었는데, L은 유독 고객에게 쓴소리 듣는 것을 못 견뎠다. 환불이 왜 안되냐는 고객의 짜증에 ‘7일 지나면 환불 안 된다고요!’라고 윽박을 지르거나 ‘아 왜 나한테 그래요’ 하면서 되려 짜증를 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가능하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우리 콜센터는 신생팀인데다가 최소 5시간의 대기시간을 뚫어야 연결되는 극악으로 낮은 응대율 탓에 연결되는 전화마다 거의 100% 확률로 민원 건이었다. (민원이 아니었던 문의도 5시간 이상의 대기를 거치며 모두 민원으로 발전했다.) 이곳저곳에서 상상할 수 없게 일이 터지고 있어서 관리자들도 정신이 없었다. 그냥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사람만 있으면 어떻게든 뽑아서 자리에 앉혀놓는 상태였다. 거의 모든 직원이 콜센터를 처음 경험해보는 무경력 사원이었고 나이도 대부분 2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상담원들의 응대는 프리스타일 그 자체였다.     


L의 자리는 내 왼쪽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그 친구가 어떻게 고객을 응대하고 있는지가 다 들렸기 때문에 나는 괜히 혼자 노심초사한 적도 많았다. 잘못 안내하는 건 기본이고 워낙 퉁명스럽고 성의가 없어서 친구인 내가 봐도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닌가 싶은 적이 많았다. 내가 보기에 L의 한 통화 한 통화는 빠짐없이 살얼음이었다.     

당시 티켓몬스터는 7일 이내 환불 정책이라고 해서 구매 후 7일이 지나면 환불이 절대 불가했다. 구매 후 7일이 지나서 환불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뉴얼대로 안내해야했다.


‘고객님. 구매 후 7일이 지난 쿠폰은 단순변심으로 인한 환불이 어렵습니다.’


내 친구 L은 에너지 소모를 막기 위해서 이를 자기식대로 줄여 사용했다.


‘단순변심은 환불 안돼요.’


이 얼마나 간결하고 무례한 표현인가. 나는 정말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하면 안된다고 몇 번이나 조언했지만 L이 ‘아 몰라. 귀찮아.’로 일관하는 통에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옆 자리에서 ‘단순변심은 환불 안돼요’라고 말하는 L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불 건이군. 그렇게 생각하고 내 문의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L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네? 아닌데요. 그게 아니고요...’ 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친구는 한참이나 엉거주춤 서서 사과를 했다. 그걸 본 사람들은 모두 깔깔 웃었다. 나중에 통화를 다시 들어보니 대화가 이랬다.     


“내가 쿠폰을 환불을 할려고 하는데 이거 환불이 왜 안 되는 거야.”

“7일 지나면 환불 안돼요.”

“내가 지방으로 이사를 가서 사용을 못해서 그래. 환불 좀 해줘.”

“단순 변심은 환불 안돼요.”

이 지점에서 고객이 잘못들은 모양이었다.

“뭐? 너 병신이라고 했어? 이 새끼가 미쳤나!

“네? 아닌데요? 그게 아니고요...”

어? 나한테 병신이라고 했지 ?!

“아니 그게 아니고요 변.심이요 변.심. 병.신이 아니라 변.심. 변.심. 변.심. 변.심. 변!심!. 변~심~ 변호사 할 때 변. 심란하다할 때 심! 변-심!”     


L은 서서 한참이나 변.심.변.심. 하며 무슨 노래라도 부르듯이 발음을 반복했고, 고객은 좀처럼 전화를 끊어주지 않았다. L은 땀을 뻘뻘 흘리며 울상으로 사과를 했다. 그 일이 있고나서 L은 콜센터를 그만두기로 했다. 한달 보름 만에 친구를 잃게 되었다.      


친구의 퇴사로 시트콤이 끝난 줄 알았는데 사실 시작이었다. 내 비어있는 왼쪽 자리에는 이력서의 지원동기란에 ‘사투리 교정’이라고 적은 갓 상경한 강원도 출신의 형이 들어왔다. 그 형은 사투리 교정의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은 채 늘 진한 강원도 사투리의 억양으로 상담을 했다.      


5시간을 넘게 전화를 걸었다는 손님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의자를 뒤로 빼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통화를 하기도 했다. 업체가 쿠폰을 사용하는 자신을 무시했다는 손님에게는 ‘아주 싸가지가 없는 놈이네요.’라는 격한 공감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양복업체가 돈만 받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양복을 맞출 수도 없게 되었다는 문의를 받고 ‘저희가 지금 잡으러 갔으니까 걱정마세요. 법의 심판을 받을 거예요. 정 안되면 제 돈으로라도 어떻게 해드릴게요’ 라며 휴머니즘 가득한 상담을 했고, 우리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     


그때 콜센터에서 일했던 기억은 참 좋게 남아있다. 거의 모두가 격식 없는 자세로 전화를 받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진심어리게 일했다. 한 시간에 한통의 전화를 받는 한이 있어도 분실된 택배상품을 어떻게든 찾아주려는 형들이 수두룩했다. 안타까운 사연에 같이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 간혹 맞받아 성질을 부리기도 했지만 오랜 기다림의 고객에게 하염없이 사과를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사람들. 지금은 모두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정말 궁금해진다. 나는 요즘도 그때 ‘변심이요 변.심.’하던 친구의 그 난처한 목소리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통화하던 강원도 출신의 형을 떠올리면서 배실배실 웃는다.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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