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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택시를 타고 도착한 경포대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찬바람이 몹시 불었고, 코트 사이로 바람이 찌르며 들어왔다. 나는 옷깃을 추스르면서 옆에서 따라 걷는 미영을 쳐다보았다. 혹한의 날씨에 볼과 코가 금세 빨개졌음에도, 추운 기색없이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바다와 검은 하늘 사이에도 수평선이 또렷하게 보였다. 물과 하늘은 검은색이라도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생각에, 다시는 섞일 수 없는 미영과 내가, 사실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이 실감났다.
“저번에는 어땠어?”
미영이 갑자기 물었다.
“뭐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구체적인 대답이 어려웠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은 자세였다. 목덜미의 잔털이 보인다. 쓰다듬을 때 분명하게 느껴지던 감촉이 새삼 떠올랐다.
“저번에도 왔었다며. 그때 나는 어땠어?”
“신났었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해변가로 뛰어들어서 모래를 발로 차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지금도 해변가 어디에서 그때의 그녀가 여전히 뛰어다니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미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에게 충격적이고도 아름다웠던 그 기억이 그녀에겐 이제 없다는 게 어딘가 억울했다.
“그래. 모래를 발로 차면서 내 쪽으로 뿌리기도 하고, 난 그때 모래도 조금 먹었고. 잡아보라고 뛰었는데, 내가 오초 만에 잡았지.”
그때 나는 종종거리며 뛰는 그녀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서 양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참 추웠는데, 내 기억 속 그날의 바다는 추위에 대한 감각은 없는 것 같다.
“재미없어. 좀 살살 뛰지 그랬어.”
“워낙 느리길래.”
“재미없어. 오빠는 그때나 지금이나.”
파도소리가 차분히 들렸다. 어릴 때 하나님이 지구를 좌우로 슬쩍 슬쩍 흔드는 거라고 생각했어. 미영은 파도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잠꼬대를 하는 바람에 물속이 흔들린다고 생각했어. 우린 각자의 어린 시절을 귀여워했다.
“그래서 우린 이렇게 계속 걸었어?”
“응 그러다가. 저기 보이는 등대까지 갔었지.”
그녀는 질문을 하면서도 난생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어쩌다가 그 충격적인 사건들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외계인이 기억이라도 지워버린 걸까.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사건이 있던 등대까지, 방파제가 좌우로 펼쳐진 등대 길을 걸었다. 등대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볼이 얼어 아렸다. 이런 추위와 바람에 겨울바다를 걷는 사람은 그때에도, 지금도 별로 없다. 파도는 그 날보다는 조금 거칠었다. 방파제와 끊임없이 부딪히며 거품을 쏟아냈고 튀는 물방울이 근처까지 닿았다. 등대에서 멋지게 빛줄기가 나오는 장면을 기대했지만, 잠잠했다. 잠잠한 등대를 향해 걷는 걸음, 걸음이 갈수록 힘겨웠다. 자꾸만 그녀가 피를 흘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파하며 어쩔 줄 모르던, 그녀의 표정이 낯설었다. 피를 흘리며 다쳐본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다쳐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아파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녀를 앞에 두고서 당황하던 그때의 나도 그립다.
“내 손목은 어떻게 다친 거야?”
등대까지 도착하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때는 수위가 낮아서 방파제 밑에 해안가가 드러났는데, 그 바위들 위를 걷다가 이끼에 미끄러진 거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게 수위가 높아 방파제까지 살짝 잠겨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미영도 그날을 떠올리듯 바다를 살폈다.
“이 방파제를 어떻게 다시 올라왔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미영의 질문에 똑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영화 필름을 편집하듯 가볍게 삭제된 것처럼 방파제로 올라오던 장면은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새 등대 길까지 올라왔고, 거기 서있는 우리 둘의 모습이 다친 장면 이후 바로 이어졌다.
“기억이 안 나.”
“생각해 봐.”
“그러니까... 자기가 넘어졌고 팔을 찧었고, 그렇게 으깨진 듯이 상처가 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자기라고 발음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는 어땠어?”
미영이 다시 물었다. 나는 그날을 또렷이 기억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앞에 얼룩진 어둠이 아른거렸다. 그 어둠속으로 검은 바다가 흔들리듯 선명해졌다. 그날의 밤하늘과, 달빛에 윤곽을 드러낸 구름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아래에서 피를 흘리는 미영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