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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Dec 17. 2018

이상하지, 넌 내 것이 아닌데

- 소식

고작 1년의 차이일 뿐인데, 19살과 20살의 세상은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성인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어딘가가 넓어지고,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눈이 확 트이는 듯 했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예쁜 여자들이 너무 많았다. 안 그래도 들뜬 기분이 더욱 더 들떠서 맥락없이 배실배실 웃고 다녔다. 동기들과도 친해지고 매일 술을 마시러 다녔다. 술을 많이 마셨더니 다음날 물을 마셔도 술맛이 나고 샤워를 해도 술 냄새가 났다.


그러던 중 자주 만나서 놀던 여자 동기 한 명을 좋아하게 되었다. 고백할 용기는 없어서 주위만 맴맴 돌았다. 하루는 선배 하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길래 없다고 했는데 그럴 리가 없다면서 끝까지 추궁을 했다. 자기한테만 말하라고 해서 조심스럽게 말했더니 일주일 후에는 과에 소문이 다 나있었다. 동기들은 나를 도와주겠다고 은근슬쩍 자리를 붙여주거나 술자리가 파할 때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라고 나를 막 떠밀었다. 나는 같이 자리에 앉아도 그 쪽으로는 고개도 잘 못 돌리고, 버스를 태워 보낼 때는 시덥잖은 헛소리만 남발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1학기가 끝나고 대학에서 맞는 첫 여름방학이 되었는데 마음이 잘 맞아서 우리 학번끼리 MT를 가기로 되었다. 친구의 큰아버지가 강원도 횡성 어디에 펜션을 하신다고, 숙박비도 필요 없다고 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해서 열심히 놀았다. 근처에 딱 하나있던 구멍가게에 있는 소주를 우리가 다 사마셨다. 마지막 날에는 소주를 아껴먹어야 했을 정도였다.


둘째 날 저녁에는 고기를 구워먹기 전에 게임을 하기로 했는데, 둘씩 짝지어서 폐교에 숨겨둔 쪽지를 찾아오는 게임이었다. 물론 친구들은 나와 그 여자친구를 커플로 묶어 주었다. 삼십분이나 학교를 헤메면서 쪽지를 찾았다. 머릿속엔 온통 고백할 생각뿐이었다. 가는 내내, 그리고 폐교에서 쪽지를 찾는 내내 나는 망설이기만 했다. 가슴이 어찌나 뛰던지, 심장이 쿵쿵 할 때마다 눈에 있는 실핏줄에서도 압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면서 고백의 말을 떠올리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기를 짜내서 고백을 했는데, 차였다. 늘 잘해줘서 정말 고맙지만 남자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는 얘기였다. 저녁에 먹은 고기 맛이 썼다.


차이고 나서도 좋은 마음은 그대로여서 그냥 좋아하는 채로 살았다. 그때부터는 별 티도 내지 않고 겉으로는 그냥 친구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 그냥 좋아하는 마음만 가졌다. 예쁜 친구였는데 2학년이 되도록 그 친구는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남자에는 관심이 없는 걸까. 나는 그냥 인공위성처럼 주위를 맴맴 돌다가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일병 쯤 된 어느날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면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는데 친구 한 명이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서댐아 걔 남친 생겼대.’ 마음 어딘가가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아 그래? 잘 됐네.’


전화를 끊고 주먹으로 턱을 맞은 사람처럼 비틀대며 생활관에 들어갔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까 동기 하나가 와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발끝으로 떨어질 듯한 힘없는 목소리로 “내가 좋아하는 애가 남친 생겼대.” 하고 대답했다. 내 말을 듣고 동기가 다시 물었다. “여자친구야?” 그래서 아니라고 했다. “만났던 사람?”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뭐는 있었어?” 그것도 아니라고 했더니, “근데 무슨 헤어진 사람처럼 그러고 있어.” 하면서 면박을 주었다.     


그 순간에는 공감능력없는 친구가 죽일 듯이 얄미웠는데, 생각해보니 그것도 참 맞는 말이었다. 나는 누구에게 왜 상처받은 것인가. 만나고 있는 것도, 만났던 것도 아닌 사람인데 왜 빼앗긴 기분이 드는 걸까. 나는 그 마음을 이상해하면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었다. 그때의 한없이 찌질하고 솔직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 노래를 자주 부르고 듣는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노래를 부르고 들을 때마다 나는 그때의 슬픔에 대해 이해할 듯 말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소식
네가 타야할 버스를 기다리던 그 어두운 밤
나와 넌 쑥스러운 모습으로 거릴 두고 있었지
난 너에게 사랑을 물었고 넌 무슨 대답을 했지만
이제는 네가 어떤 대답을 했는 지 잘 기억이 안 나
-
이상하지 넌 내 것이 아닌데
아찔하지 마음 한 구석이
어질어질한 머릿속으로 보이는 건 네가 취했던 날이 내게 기댔던 날이
-
 나는 네 손을 머뭇거리며 잡고 너와 눈을 맞췄지
너의 버스가 오지 않기를 맘 속으로 계속 빌었어
네가 새 남자친구를 만난다는 소식 들었어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내 맘이
-
그것 참
 -
이상하지 넌 내 것이 아닌데
아찔하지 마음 한 구석이
 어질어질한 머릿속으로 보이는 건 네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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