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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Dec 24. 2018

그녀를 위해 '만들었던' 크리스마스 캐럴

- 소복소복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하나 떠올려보라고 하면, 항상은 아니겠지만 꽤 잦은 빈도로 2014년 크리스마스를 꼽을 것이다. 행복한 기억들을 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그날의 크리스마스는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높은 등급의 하루였다.


2014년, 학교 앞 자취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만나던 여자친구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지 의논하다가 자취방에서 크리스마스부터 2박3일 동안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함께 살던 룸메이트에게는 양해를 구했다.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우리 커플을 위해 방을 비워주기로 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다이소에 가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사용하는 각종 장식품들을 한 꾸러미 샀다. 공 모양의 장식과 반짝거리고 복슬한 띠나 밴드 같은 것들. 동아리방에 방치되어있던 길쭉한 꼬마전구도 챙겼다. 자취방에 도착해서는 천장에 공과 벨을 달고, 벽에는 꼬마전구를 구부리며 붙여서 트리모양으로 만들었다. 풍선은 거의 이십 개 정도를 불어서 몇 개는 천장에 달고 나머지는 이곳저곳에 흩어 놓았다.


방을 완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놓고서 나는 밖으로 나갔다가 문을 열고 자취방으로 몇 번이나 들어가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모습일지 확인하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여자친구의 기분이 어떨지 상상하기 위한 마음이 더 컸다. 들어가자마자 벽에서 반짝거리는 트리모양의 꼬마전구와 투명한 실로 매달아서 하늘에 떠있는 듯한 색색의 공 모양 장식품들. 분위기가 끝내준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고, 방에 도착하기 전 이마트에서 여자친구와 장을 봤다. 물만 부어서 끓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해물탕 세트와 와인, 맥주, 과자, 음료수 등등. 정말 완벽했다. ‘결혼하면 정말 좋겠다. 퇴근하고 아내와 영화를 보고, 장을 보고, 밤에는 와인 한 잔을 하고…’ 여자친구와 카트를 끌고 장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다.


자취방 문은 여자친구가 열도록 했다. 방은 어제 꾸며놓은 그대로였다. 조명이 반짝반짝, 작은 방을 비추고 있었다. 여자친구는 그걸 보고 귀엽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아직도 생생한 표정이다. 같이 요리를 해서 먹고(해물탕은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심각하게 싱거웠다.) 와인을 한 잔 하고, 그리고 나서는 2박3일 동안 바깥에는 나갈 생각도 안했다. 방에서 내내 뒹굴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세상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는데 둘째 날에는 혹시 세상이 멈춘 게 아닐까 싶은 기분이었다. 시계도 안 봤다. 멈춘 것처럼 고요한 방에서 그냥 그녀와 함께 누워서 이야기를 하고, 스킨십을 했다. 그런 반복이었다.


이 노래는 2014년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두고 만들었다. 다이아몬드보다 아름다운 그녀와,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으며 걷는 우리 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는 들뜬 기분으로 멜로디를 만들고 가사를 썼다. 100점 만점의 크리스마스를 기대했는데, 기대했던 만큼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나는 이 사실이 이후로도 자주 신기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조금 김빠지는 뒷얘기.

-

‘산타는 없지만 나는 항상 너의 곁에 있을 거야.’

-

노래까지 만들며 달달한 척 실컷 해놓고서는 다른 사람에게 빠져서 그녀를 찼다. 이듬해 5월이었다. 항상 곁에 있겠다더니 반년도 못간 약속이 됐다. 누굴 차고 연달아 다른 사람을 만날만큼 매력적인 남자는 지금도 그렇듯이 그때에도 전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녀와 이별한 후 거의 갈아타듯이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평판은 거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시에는 운명의 여인을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나름대로는 정말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운명의 그녀와도 지금은 헤어졌지만.) 그 결과 차버린 그녀에게는 아마 지금도 안 만나느니 못한 쓰레기로 남아있을 것이 너무도 확실해서. 지키지 못한 민망한 약속과 함께 이 노래는 그렇게 빛바랜 채로 남았다.


나는 그 부끄러운 사연과 별개로 이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처음 만들고 부를 때만은 진심이었으니까 괜찮은 거라고 합리화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부르고 들을 때면 민망함도 함께 느낀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해서 미안하다고 편지라도 쓰고 싶어진다. 애초에 저런 말 하지나 말지. 어휴 화상아. 병신아. 혼잣말도 한다.


대학 때 음악동아리를 했다. 겨울이면 동아리 방에서 종종 이 노래를 불렀다. 자작곡 중에서도 유독 이 노래를 좋아하는 선,후배들이 꽤 있다. 다들 좋다고, 칭찬을 막 해주다가도 그녀와 곧 헤어진 얘기를 꺼내면 나에게 한껏 실망해서 ‘가사 엄청 가식적이네요’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나는 멋쩍게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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