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Feb 23. 2019

지긋지긋한 그 소주 한 병의 역사

- 아버지와 소주 한 병

아버지는 매일 밤 소주 한 병을 드셨다. 아니, 그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형으로 '드신다.'라고 하는 게 맞겠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매일 밤 소주 한 병을 드신다. 예외를 거의 찾을 수 없게 꾸준한 페이스다.


아버지는 취한 채로 집에 들어오시거나, 집에서 취하셨다. 아버지 인생에서 당신이 느끼는 대부분의 시간은 취하지 않은 상태였겠으나, 나는 항상 저녁에만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으므로 내 모든 기억 속 아버지의 절반은 취해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술 취한 아버지의 웃음이 싫었고, 찌든 담배냄새와 섞인 술의 역한 향도 싫었고, 무너진 건물처럼 무기력한 자세로 잠든 모습을 보는 것도 싫었다.


아버지의 습관적 음주와 넉넉지 못한 형편이 콜라보를 이룰 때면, 집안에서는 으레 고성을 동반한 싸움이 일어났다. 나는 가난한 것보다 집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게 싫었지만 어른의 세계 속에는 늘 가난과 싸움이 행사상품처럼 묶여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조금 진지하고 정중하게 이런 제안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술을 좀 줄이시면 좋겠어요."

"내가 일 마치고 조용히 소주 한 병 먹고 자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싫으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좀 적당히 드세요. 매일 취한 아빠 상대하는 것도 지쳐요."


아버지는 어디 가서 큰돈을 쓰고 오는 것도 아닌데 소주 한 병 마시는 게 뭘 그리 큰 잘못이냐며 되려 역정을 내셨다. 나는 매일 같이 취해있는 아버지를 어떻게 존경할 수 있겠냐고 말했고. 아버지는 나를 또렷하게 쳐다보며 너 참 웃기는 놈이구나. 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날도 소주 한 병을 드셨다. 등대지기가 매일 등대에 오르는 것처럼.


아버지와의 추억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버지의 사업은 늘 쪼들렸고, 그래서 휴일도 거의 없이 일하셨다. 멀쩡한 정신에는 나름대로 권위의식도 없고, 건전하고, 유머감각도 있는 아버지였지만 그런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다. 나중에는 취한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가 되어서 멀쩡한 아버지가 어색해졌다. 아버지 또한 그 어색함을 느꼈는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에도 그 정적을 홀로 마시는 소주로 뭉개며 취기 속에 숨어들었다.


"내가 조용히 소주 한 잔 먹고 자는 게 너희들한테 무슨 피해를 주냐?"


아버지의 단골 대사는 이러했다. 언뜻 맞는 말 같이 들렸지만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아버지가 취하면 집안의 분위기는 한없이 어두워졌고, 싸움이 발생하는 빈도도 늘었다. 비틀대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정말로.


나는 매일 밤 한 병의 소주를 참지 못하는 아버지가 미웠던 것이다. 가족들의 화목한 저녁을 위해서 하루쯤은. 딱 하루쯤은 술을 먹지 않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루쯤은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서 예능프로그램을 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하루쯤은 멀쩡한 정신으로 뉴스를 같이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나눌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알코올 중독에 가까운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늘 분노했다. 가족보다 소주 한 병이 소중한 사람. 말하자면 나에게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그런 의구심이 드는 것이었다. 소주 한 병은 아버지가 꼭 누려야 하는 이기적인 사치가 아니라, 바라는 모든 사치 중에는 포함도 안되는 가장 사소한 대안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소주 한 병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장 초라하게 남은 진통제였던 것은 아닐까. 그러자 아버지의 그 말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취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도 몇 번 들어보지 못한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복권 당첨되면 서댐이 원하는 거 하나 사주고 아빠는 딱 혼다 SUV 한대가 갖고 싶은데, 그 차 참 잘 나왔더라."

당시에는 의외라는 기분. 아버지도 뭔가 갖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만 했었다.


그랬다. 아버지는 소주 따위 말고도 원하는 게 한참이나 많은 사람이었는데, 감히 꿈도 못 꾸고 소주 한잔으로 털어버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사실 혼다 SUV를 갖고싶고 배낚시를 가고싶었으면서도 '에이. 차는 무슨 차. 낚시는 무슨 낚시. 소주 한 잔 마시고 말지 뭐.' 했던 것인데, 나는 그 소주 한 병을 꼭 마셔야하는 거냐고 물었던 것이었다.


아버지의 그 반복되는 음주를 걱정하면서, 한편으로는 미워하던 어느날. 아버지가 갖고 싶다던 혼다 SUV 자동차와 '매일 소주 한 병 먹는 게 그렇게도 큰 잘못이냐'는 아버지의 말이 감은 눈 속으로 겹칠 때. 그 지긋지긋한 소주 한 병의 역사가 하염없이 슬퍼서 나는 왕 -하고 울어버리고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박서운이라는 할머니의 이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