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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n 15. 2019

나는야 낭만적인 가고시마 여행자

여행 실수담

작년, 혼자 가고시마에 갔을 때였다. 나는 별 계획도 없이 배회하다가 문득 라이브 바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타 치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한가하면 주인에게 기타를 좀 쳐봐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맥주를 마시면서 기타도 치고. 음악은 만국공통어니까 서로 기타 치고 노래하다 보면 사장하고 친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낭만적인 기대가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마침 라이브 바가 하나 보였다. 주인은 문만 열어놓고 아직 분주히 영업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번역기를 켜가지고 '맥주 마실수 있나요?' 했는데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짓는 거였다. 그는 짧은 영어로 맥주가 비싼 편이니 맥주를 먹고 싶으면 다른 집으로 가라고 말했다. 나는 기타 치고 노래하면서 당신하고 얼렁뚱땅 친해지고 싶은 건데요 라고 말할 능력이 없었다. 그냥 더듬거리다가 나와버렸다. 일본어를 못하니 조금 어렵겠구나. 실망하던 차에,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공연 중인 라이브 바가 있었다.


들어가려니까 누가 마중을 나와서는 나가라는 제스처를 했다. 나는 영어단어를 띄엄띄엄 나열했다.

아이. 워너. 리슨. 투. 뮤직. 앤드. 드링크. 비어.

일본에서 라이브로 연주를 듣는 것도 좋은 경험일 거야. 그런 마음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가게 입구를 막아선 여자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손사래를 쳤다.


맥주도 비싸고 음악을 듣는데도 돈을 내야 하니 그냥 가세요.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답했다. 돈 낼 거야. 얼만데?


내가 묻자 pay for music 산젠 고햐쿠엔. 이런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


350엔이니까 한국돈으로 3500원. 맥주야 만원이 안될 거고. 그 정도면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제야 들어오라는 몸짓을 했고, 설레는 맘으로 입장했다. 주황색 핀 조명을 받은 연주자들이 악기와 한 몸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좁은 라이브 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연주에 집중고 있었다. 나도 구석에서 연주를 들었다. 주인아저씨는 좁으니까 이쪽으로 서라고 손짓을 했다. 기타노 다케시를 꼭 닮은, 야쿠자가 어울리는 외모였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아코디언. 재즈 트리오의 연주는 훌륭했다. 다만 너무 빨리 끝났다. 들어가서 고작 두 곡 정도를 들었을 뿐인데 벌써 앙코르 곡이었다. 나는 세곡밖에 듣지 못했다. 벽의 팸플릿을 보니 내가 들어왔을 때는 이미 시작시간에서 한 시간 이상 지난 상태였다.


열렬한 박수와 함께 (나에게만 싱거웠던) 공연이 끝났다.

기타노 다케시 닮은 주인아저씨는 내 어깨를 두드린 건지 때린 건지 헷리게 나를 돌려세워놓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산젠 고햐쿠엔.


순간 찝찝함과 당혹감이 엄습했다. 산젠 고햐쿠엔이 얼마더라? 350엔이 맞나? 이렇게 싸게 들을 연주는 아닌 거 같은데? 백이 햐쿠고 천이 젠이었나? 뒤늦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스마트폰으로 잽싸게 검색했다. 산젠 고햐쿠엔은 역시 3,500엔. 그러니까 35,000원이었다. 노래 세 곡 듣고 삼만오천 원이라니 식은땀이 났다.


멍청한 척을 해야겠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으로 지갑을 열어 350엔을 건넸다. 주인아저씨는 돈을 받지도 않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산. 젠. 고. 햐쿠. 엔.


그리고는 한동안의 실랑이를 했다. 나는 저스트 쓰리 송을 들었을 뿐이라고. 투 익스펜시브하다고 졸랐다. 알아듣든지 말든지 한국말로도 읍소했다. 주인은 단호했다. 당장 내 얼굴을 치기라도 할 듯이 인상을 쓰고 역정을 냈다.


도저히 먹힐 것 같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카드를 내밀었다. 근데 온리 캐시. 온리 캐시. 하며 카드를 물리쳤다. 다행카드단말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현금이라고는 천 엔 밖에 없었고. 그걸 보여줬다. 카드를 내밀 때 돈을 내겠다는 의사가 반영된 때문인지. 아저씨는 한숨을 쉬고는 그거라도 달라고 했다. 산젠고햐쿠엔 낼 것을 젠엔으로 마무리했다.


 기타노 다케시 닮은 주인아저씨는 나가기 전, 악수를 청했다. 트럼프의 악수처럼 손을 부술 듯이 세게 잡고 흔들었다. 손이 얼얼할 지경, 하지만 불쾌한 티도 못 내고 적당히 아리가또를 외치며 서둘러 출구로 향했다.

 

이런 어글리 코리안을 봤나. 들어오지 말는데도 당당하게 들어오더니 흥정이나 하고. 도망치듯 가게를 나설 때는 무척 부끄럽고 미안했다. 여행하면서 여러 흑역사와 실수들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부끄럽기는 또 처음이었다.


가고시마는 어땠어?

한국에 돌아와서 친구와 술을 마셨다. 어땠냐고 묻는 말에

어. 뭐. 되게. 좋았지. 성의 없이 대답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친구는 가고시마에서 제일 기억에 남은 게 뭐냐고 했다. 나는 당연히 재즈바에서의 멍청한 실수를 떠올렸지만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외국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로컬 라이브 바에서 기가 막힌 재즈 트리오 연주를 들었어.


딱 그 정도만 언급하고 말았다. 무례하고 멍청한 실수에 대해서는 부끄러워서 별로 얘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여행에서의 아름다운 에피소드는 얼마만큼의 진실을 숨긴 채로 떠돌까.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이름도 잊은 가게와 연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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