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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22. 2020

‘어른스럽게’라는 말의 두 가지 의미

영화 <결혼 이야기>

내가 제일 싫어하면서, 제일 좋아하는 영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은 조금이라도 안일하게 만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진부해진다. 유치하고, 단조롭게 느껴진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사랑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주인공처럼 신출귀몰한 사기 범죄를 저지르지도 못하고, 아이언맨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며 세상을 구할 수도 없지만, 사랑만큼은 모두 한 번쯤 해보았다. 단 한 번의 연애만으로도 사랑의 흥망성쇠를 오롯이 체험할 수 있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도 사랑에 관해서 타인에게 조언까지 가능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모두가 사랑에 대해서 한 번 쯤은 세세하고 강렬한 기억이 있으므로. 그러니까 사랑 영화는 정말 잘 만들어야 한다.     


<결혼이야기>는 어떠냐면. 좋은 의미로 정말 끝장난다. 사랑이 무너지고, 다투는 과정에서 그 감정의 결을 정말 세밀하게 다루었다. 영화 속에서 감정의 표현도를 화소로 설명할 수 있다면 1억 화소쯤 된다. 그들이 그렇듯이, 그들을 지켜보는 나또한 휘청휘청한다. 울먹울먹한다.      

영화: 결혼이야기(2019)

이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어른스럽게 라는 말    


둘은 “어른스럽게” 헤어지려 한다. 그들은 일반적인 부부와는 다르다. 예술가고, 사랑의 파멸 속에서도 서로를 존중할 줄 아는 멋진 사람들이다. 변호사나 법적 절차 따위는 필요 없다. 둘은 어른스럽게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양보...하며, 또 응원하면서 서로를 보내주려 한다. 사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니콜이 먼저 마음을 바꾼다. 둘은 이제 "어른스럽게"가 아니라 “어른스럽게” 헤어지게 된다. 전자가 말랑말랑하게 패를 다 보이고, 이해하고, 사정을 봐주는 낭만적 어른이었다면, 이제 그런 낭만적 어른들의 따뜻한 이혼은 사라졌다. 버팔로의 낭심을 물어뜯는 표범처럼 서로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최선을 얻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 를 찍고 남이 되는 일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들은 점 하나를 그렇게 아프게 찍는다. 어른의 의미가 온통 뒤바뀐다. 나는 그들의 성숙할 뻔 했던 초반부의 이별을 보면서 “어른스럽다”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들이 잔인하고 날카로운 법적 절차를 택했을 때도, “어른스럽다”는 말이 떠올랐다. 둘 다 적절해보였다. 진짜 어른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어른스럽다”는 말은 아직도 혼란스럽다.       


영화: 결혼 이야기(2019)


2. 사랑은 시간을 잊게 만들고 시간은 사랑을 잊게 만든다  


사랑에 관한 격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언제나 경험한다. <우리도 사랑일까>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헌 것보다 새 것이 좋아. 그런데 새 것도 헌 것이 돼.” 모든 새 것은 헌 것이 된다. 우리는 늘 가질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존재다. 가지고 싶어서 가졌지만 가지고 나면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닌 것. 사랑의 상대자는 보통 그렇다. 처음 만나 호감이 생긴 이래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상대에 대해서 알아 가는데, 왜 이별은 언제나 잘 알지 못할 때보다 잘 알게 되었을 때 벌어질까? 상대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이별 또한 가까워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왜 상대방에 대해서 자꾸 알려고 할까. 궁금해 할까. 처음에는 이해되었던 단점이 왜 나중에는 이별의 지저분한 이유가 되는 걸까. 왜 그렇게 비겁할까 사람은.


식은 사랑을 아프게 담아내는 이야기들은 모두 못난 나의 모습을 투영하고, 마음을 뒤흔든다. 그들은 왜 그렇게 사랑을 해서. 왜 그렇게 아프게 헤어지는 걸까. 왜 현실은 그렇게 복잡하고 지루한 절차로 가득할까. 질문은 수도 없이 싹튼다.     


찰리와 니콜의 싸움에서 재미난 말이 나온다.      


“난 매일 눈 뜰 때마다 당신이 죽길 바래! 헨리가 괜찮다는 보장만 있으면! 당신이 병에 걸려 차에 치여 죽었으면 좋겠다고!”       


병에 걸려 죽을 거라면 차에 치일 필요가 없고, 차에 치여 죽을 거라면 병에 걸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찰리는 그렇게 말한다. 병에 걸려 차에 치여 죽었으면 좋겠다고. 이 얼마나 절절하고 현실적인 증오의 말이란 말인가. 더 이상 논리의 영역에서 머무르지 않는 순수한 증오의 마음. 이 잔인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알을 깨고 흘러내렸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가장 깊은 증오는 사랑이 전복될 때만이 잉태되는 것. 나의 여러 경험들과 겹친다.     


영화: 결혼 이야기(2019)


3. 남한산성     


영화 속에서 니콜과 찰리가 가장 격정적으로 다퉜던 이유는 ‘어디에서 살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그것만큼은 조율할 수가 없었다. 니콜은 LA에서 살기를 원했고 찰리는 뉴욕을 고집했다. 영화의 막바지에 그들은 상처만을 남긴 채 아이를 각자의 터전으로 데려가고, 데려오고. 그렇게 살기로 한다. 그리고 참 허탈하게도, 찰리는 UCLA의 교수가 된다. “나 교수가 됐고, 당분간 LA에서 지내.” 그 소식을 전하는 장면에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남한산성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추운 겨울 남한산성의 성곽에 올라서서 적들을 감시하는 경계병들에게 방한용으로 가마니를 지급했다. 성안의 식량은 나날이 떨어져가고, 급기야 말들이 모두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자 왕과 신하들은 병사들의 가마니를 빼앗기로 한다. 경계병들은 몸을 걸칠 가마니마저 없어져서 벌벌 떨며 근무를 선다. 가마니를 죽으로 쑤어 말들을 먹였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식량은 바닥이 나고, 말들이 죽기 전에 그냥 모두 잡아버린다. 나눠준다. 말고기는 병사들의 부실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허기가 찾아올 것이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다. 추위를 조금이라도 막아주던 가마니만이 사라진 것이다.      


찰리도 이와 같아졌다. 찰리는 LA에서 만큼은 살 수 없다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걸었는데, UCLA의 교수가 되고 LA에서 살게 된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그 눈빛. 따로 설명이 필요없다.     


영화: 결혼 이야기(2019)


마침.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타인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라고 정의했다. 찰리와 니콜은 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랑을 했다. 그들은 서로를 아꼈고, 성장을 응원했고 지지했다. 그들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들도 있었다. 하지만 찬란한 영광을 뒤로하고 폐허가 되어버린 그리스의 유적처럼 모든 것은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결혼 이야기는 끝내 비극적이었다. 삶의 어떤 부분이 완벽하고 처절하게 망가졌는데도, 서로 이 결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는데도 이를 되돌릴 수 없음을 그 둘은 알게 되었다. 또한 그걸 지켜본 나도 알 수 있었다. 참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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