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장례식을 치르며

- 넌 나에게만 죽은 사람.

by 서댐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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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귄지 갓 두 달이 되었을 때, 너는 우리가 사귄 날 만큼의 여행을 가겠다고 했지. 나는 사실 정말 싫었는데, 여자친구의 꿈을 방해하는 못난 남자친구가 되는 것 같아서 쿨한 척을 했어. 재밌게 다녀오라고. 그게 네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 경험은 널 더 특별한 여자로 만들어 줄 거라고. 그렇게 너는 태국을 거쳐서 인도로 떠났어.


인도에 가기 전 날. 두 달 가까이 되는 일시적인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데이트를 했던 기억이 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쭉 올라가면 있는 그 낙산공원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지. 같이 밤길을 걷다가 전망이 탁 트인 곳에 도착해서는 서울을 내려다보고, 이어폰을 나눠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이나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어. 너도 기억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미하고 싶은 시간들이 있지. 나는 너를 뒤에서고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가득한 서울 도심을 바라보았어. 너는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었고, 나는 아무 생각 안했다고 재미없게 대답했었는데.


사실 도시의 불빛을 보고.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로 이 도시는 움직이고 있구나, 하면서. 누군가에게는 치열하고 피곤함으로 가득한 이 시간에 나는 비교적 걱정 없이 이런 낭만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감사하고 있었어.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였으니까.


그러다가 낙산공원 성곽 쪽의 벤치에 앉아서, 우리가 떨어지는 걸 아쉬워했던 시간. 각자 얼마나 아쉬운 지 대결이라도 하듯 대화를 나눴지. ‘내가 더 슬퍼, 내가 더 아쉬워’ 식의 그 유치한 대화.


그때 내가 했던게 오늘 갑자기 생각나더라.


‘나는 너무 아쉬워서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이 장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할 거야.’


그리고 나는 우리가 앉아있는 풍경, 색깔, 냄새, 너의 옷차림과 표정, 얼굴 심지어는 달이 떠있는 위치까지 남김없이 기억하려고 애썼어. 마치 사진처럼. 한 장의 사진처럼 내 머릿속에 그대로 옮겨놓고 싶었어. 평생 까먹지 않을 만큼 구체적으로.


그래서 너랑 말도 하지 않고 10분 동안 주위를 둘러보고 냄새를 맡고 온도를 느끼고 너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었는데, 근데 그 모든 장면이...


오늘 떠올려보니 하나도 기억나지 않더라고. 허무하게도 기억나는 건, 하늘에 떠 있는 달의 위치뿐이었어.


내일이면 올해도 끝나는 이 시점에서

‘나는 이제 너를 거의 다 잊었구나. 너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도, 너를 생각하는 그리움도 많이 옅어졌구나. 너를 생각하면서, 너를 쓰면서, 많이 비워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어


그동안 나는 내 마음속으로 열었던 잠정적인 장례식을 통해 '너와 나의 사랑'을 오래 애도했고, 이젠 보내주기로 했어. 너의 장례식을 치른다는 건 그런 말이야. (멀쩡히 살아있는 네가 들으면 기분 나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미안.)



사람이 왜 장례식이란 걸 하는 지 알아? 그건 마음 놓고 슬퍼하기 위해서야. 사람의 마음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슬퍼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버리면 너무 슬프니까. ‘그래. 며칠 동안은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해 슬퍼하자. 그리고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슬러서 현실로 돌아오자’ 그런 의미로 장례식이 치러져.


형사가 범인을 체포할 때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해주잖아? 어차피 묵비권이란 거 없어도 말 안하면 그만이니까.

말하지 않을만한 건 어차피 말하지 않을 테니, 권리로 줘 버리는 것처럼


슬퍼하는 것에는 도리가 없으니까 실컷 슬퍼해야 해.


지난 네 달 동안의 긴 장례식을 마치면서, 너와 나의 추억들을 태우고 갈아서 조금씩 종이위에 흩뿌렸던 시간을 떠올려보면, 꽤 후련한 것 같아.


새해가 오면 나는 이제 더 멋진 원래의 나로 복귀해서 멋진 삶을 살아갈 거야.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웠고,


...


그리고 네가 아플 수 있는 사랑이어서 고마워. 그만큼 진심이었다는 거잖아.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하길. 너도 나도.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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