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그런 날도 있었다

- 잊을 수 없다. 라는 문장

by 서댐
너와 그런 날도 있었다. 잊을 수 없다.


라는 문장으로 너를 떠올리는 건 어떨까. 기억이 먼저가 아니고, 저 문장으로 너를 떠올리고 싶은 밤. 나는 생각에 잠긴다. 텅 빈 머리에서 먼저 중얼거려본다. 그런 날이 있었지. 잊을 수 없지. 그 날은 무슨 날이었니.


첫 줄을 적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먼 데서 흐릿하게 어떤 기억들이 스물스물 솟아오른다. 떡볶이가 보였다. 잊을 수 없는 날. 흐리던 잔상들이 점차 선명해졌다.


안국역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다. 북촌 한옥마을을 가보기로 했었다. 너와 만나고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반가운 인사를 했을 거다. 기억나는 건 내가 너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고 걸었다는 것 정도. 그렇게 길을 따라 걸었다.


한옥마을로 올라가는 길 양 쪽으로 한옥집도 있고, 한옥 흉내를 낸 가게도 보였다. 카페가 많았던 기억인데, 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조잡한 기념품 가게도 기억이 난다.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좁고 복잡한 그 길들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무엇을 찾아갔더라, 아무튼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분명 뭘 찾아갔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꼬불거리는 골목을 누비면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때의 대화들은 모두 증발해서 지금은 없다. 쉴 새 없이 웃었을 텐데, 참 아깝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그렇게 걸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구간이 있었다. 어떤 사진사분이 즉석 사진을 마구 찍어주고 계셨다. 수없이 많은 외국인들과, 커플들이 줄을 서고 있었는데 돈을 안 받으셨다. 적다보니까 이름도 생각이 난다. ‘행복한 사진사’라는 닉네임으로 즉석사진을 찍어주시는 일종의 봉사였다. 사람도 붐비고 해서 그냥 지나갈 요량이었는데, 마침 앞에 대, 여섯 명밖에 없어서, 우리도 찍기로 했다.


나는 그날 찍었던 사진을 참 아꼈다. 너는 나에게 꼭 안겼다. 사진에 담긴 너의 모습은 실물보다 조금 못했는데, 그 사진 속에서 나는 세상 누구보다 귀하게 사랑받는 남자였다. 너는 정말 설탕같이 나를 쳐다봤다. 그때 나는 인화된 사진을 보면서, 내가 생각보다 더 매력 있는 사람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줘서 사실 지금도 고맙다.


사진 두 장을 받아서 내리막을 걸었다. 너는 한 장을 영 마음에 들지 않아했고 나는 예쁘다고 했다.


살짝 내려오니까 다양한 기념품도 팔고 펜화도 걸려있고 그랬다. 투박한 주택가를 내려다 보니 기분이 좀 좋았다. 너에게 뭔가 사줄까? 했던 것 같은데 사준 기억은 없다. 아마 거절한 모양이지.


네가 떡볶이를 먹자고 했다.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갑자기 생각나서 검색해봤는데, 풍년떡볶이. 유명한 가게였다. 인터넷으로 가게를 검색하니까 익숙한 실내 장면이 보인다. 갑자기 나를 그 시간을 훅 데려갔다.


떡볶이는 별 맛 없던데, 너랑 이것저것 시켜서 꽤 배부르게 먹었다. 가격도 참 쌌다. 줄이 길어서 한참 기다린 때문에 몹시 시장했다.


가만히 떠올리고 있으니 참.

그런 날도 있었다. 우리가 북촌 한옥마을을 걷던 날도 있었다. 너를 잊고 지낼수록 흐려지는 기억들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오늘이 아마 그런 날인가보다. 너와 헤어지고 좋은 점은 셀 수도 없이 많다. 한 달에 영화를 거의 20편씩 보고. 글을 쓰고 책을 본다. 노래도 듣고. 주말엔 그동안 연애때문에 만날 수 없었던 이성 친구들 몇 명과 가벼운 데이트를 한다.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고, 또 술을 마시면서 사귀지 않을 만큼만 교류한다. 사실 다시 이별을 겪는 건 조금 무섭다.


일을 하고, 피곤해 한다.


그리고 오늘은 여섯시 반에 집에 들어와 두 시간을 누워 있다가 팔굽혀펴기를 100개 쯤 하고. 샤워를 했다. 거울에 몸을 대보면서 힘도 주고, 시원한 물을 온몸으로 뿌렸다.


핸드폰을 술술 넘겨보고, 기타를 잠깐 치고, 노래를 하고, 그러다가 문득 한 줄 문장이 떠오른 것이다.


너와 그런 날도 있었다. 잊을 수 없다.


너에게 마음을 쓰고, 지나간 기억에 마음을 쓰고, 종이 위에 마음을 쓴다.


한 줄 문장은 나를 북촌 한옥마을로 데려간다. 그런 날이 있었지. 너와 그런 날도 있었구나. 나는 조금 초라한 표정으로 글을 쓴 것 같다.


오늘의 회상 덕분에 기억의 유통기한이 조금은 늘어났을까. 오래 지나도 조금은 남아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글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늘 어렵다. 허전함도 한 편의 글이 된다. 나는 기억이 글이 되는 일을 늘 신기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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