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 맞은편의 기억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빠지곤 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나는 늘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한 명을 꾸준히 좋아한 경우는 없었고 매년 달라졌다. 보통 같은 반 친구였는데, 짝이 되거나 성격이 잘 맞아 장난을 많이 치다보면 어느새 그 아이가 좋아졌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마다 걔를 대하는 내 표정이나 말투, 행동들이 모두 신경 쓰이곤 했다. 그런 어색함은 죽 이어졌다. 군대에 갈 즈음까지도 이성 앞에서는 소심했기 때문에 늘 들키지 않게 완벽한 짝사랑을 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개인적으로도 노력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성격도 많이 변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각기 다른 사람을 상대로 해왔던 짝사랑도 그치고 운 좋게 몇 번의 연애를 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마법 같은 일. 그런 일이 실제로 나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수학여행으로 일본에 가보았다.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다. 별로 잘 사는 동네도 아니었는데 내가 가기 직전 해부터 일본으로 배를 타고 가는 수학여행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해외라는 곳이 유독 나에게만 멀어보여서, 혹시 외국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심도 해보았다. 멀리서 일본 땅이 보일 때. 쿵쾅쿵쾅 뛰던 그 심장을 잊지 못한다.
이를테면 첫 연애의 기억이 나에겐 일본에 처음 도착하던 때의 마음과 같다. TV나 소설을 통해 보았던 것. 전해 들었던 그 추상적인 일들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누군가를 마음 놓고 좋아해도 된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연애를 해보니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행복이 더 있었다. 그건 사랑받는 일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애를 쓰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해주는 일. 싫어하는 것일지라도 나를 위해 가고, 먹고, 하는 일.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며 혼자 안절부절하는 일. 좋아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 질투하는 일…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친구도 필요 없고 가족도 필요 없고 그냥 세상에 둘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겠다는 기분. 이 행성이 나를 미워해도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 사랑받는 기분은 우주에서 왕따 당해도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녀만 있다면.
그래서 미처 몰랐다. 헤어지고 나면 우주의 모든 생명이 나를 좋아해줘도 별로 달갑지 않은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사랑할 사람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없어져서 드는 마음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요즘엔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몇 년 전 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쓰이던 말이 있었다. ‘여자보다 남자가 좀 더 좋아해야 오래간다.’ ‘남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야하고, 여자는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나는 이런 말들에 대해서는 별로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라고 해서 무엇이 다를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야지,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무얼 하느냐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몇 번의 연애를 통해 사랑받는 기분을 느껴본 뒤로는 완벽하게 알겠다. 사랑하는 기쁨도 크지만 사랑받는 기쁨도 못지않게 크다는 것을 이제 안다.
사랑할 대상 없이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는 요즘. 외로운 시간을 나는 거의 영화로 채운다. 오늘도 혼자 영화를 보러 대학로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을 타려고 내려오는데 상행과 하행으로 각기 갈라지는 커플의 애틋한 장면을 보았다.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나도 예전 만나던 여자친구와 그렇게 애틋한 이별을 했었다. 각자 카드를 찍고 내려가서 반대편 스크린 도어로 보이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둘 중 한 명의 차가 들어올 때까지 바라보고 때로는 사진을 찍어 보냈다.
다른 커플들의 연애를 구경하고 나의 추억들을 회상하다보면.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도 가득 들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도 가득 든다. 이같이 더운 날에도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 다닐 커플이 안쓰럽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내심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