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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19. 2021

사랑하지는 않는 마음

좋아한다 < n < 사랑한다

    

남녀공학이었던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언제나 좋아하던 애가 있었다.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매년 같은 반 한 명의 친구를 좋아했고, 고백하지는 못했다. 너무도 당연한 짝사랑이었다. 무척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그냥 주위를 맴도는 정도로 만족했다. 보통은 짝꿍이거나, 격 없이 친하게 지내는 단짝이었다. 절친이라는 이름으로 상호간에 공고했던 표면적 관계 속에서 혼자 계약위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애틋하다고만 하기에는 조금 찔리는 것이, 매년 너무도 쉽게 바뀌었다. 매 학년 반이 바뀔 때마다 나는 새로운 여자에게 반했다. 다음해, 그 다음해에도 그랬다. 그나마 조금 예외가 있다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짝꿍이다. 그 애는 내가 살면서 가장 좋아한 사람 중에 한명이었는데, 각기 다른 중학교로 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중3때 까지 그 친구를 수시로 생각했던 것 같다. 전화번호도 몰랐고 핸드폰도 없던 상태여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메신저 같은 것도 끊기는 바람에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는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금화초등학교 6학년 1반 강윤지 잘 지내니?)       


윤지한테 미안하지만. 그 애를 좋아하면서도 중학교에 갔더니 좋아하는 애는 여지없이 또 생겼다. 윤지도 좋았지만 걔도 좋았다. 그냥 둘 다 좋아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같은 반인 경우였는데 내 말에 깔깔깔 잘 웃어주는 친구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2학년이 되자 또 바뀌었고, 3학년이 되었을 때도 바뀌었다. 9년 동안 최소 9번의 짝사랑을 한 것이었다.


대학교에 가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학과 동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도 그 짝사랑은 계속 되었다. 과 동기들끼리 여행갔던 횡성의 여름밤. 이번에는 용기내서 고백을 했었는데 남자로 생각해본 적 없다는 대답을 듣고 말았다. 강제로 짝사랑의 신화는 계속 이어졌다. 고백했던 그 친구와는 어영부영 다시 친구로 돌아갔다.


대학교 1학년 때, 그 동기만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비공식적으로는 K누나도 있었다. (비공식적이라는 말이 조금 웃기지만, 나름대로 고민한 표현이다. 그 누나에 대한 마음은 언제나 헷갈렸다.) 한 학번 위였던 K누나는 엄청 귀여운 사람이었다. 과방에 친구들과 앉아있으면 문이 빼꼼히 열릴 때가 있었다. 누나였다. 누나는 언제나 얼굴만 살짝 내밀어서 안을 살폈다. 선배가 아무도 없으면 들어왔고, 선배들이 있으면 후다닥 도망을 갔다. 수줍음도 많고, 마음씨가 엄청 여리면서도 4차원의 유머감각이 있었다. 나는 애끓으며 동기를 좋아하고 있었는데도, 그런 누나의 모습을 보면 또 설렜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서 누나는 종종 학과 회식이 끝나갈 쯤에는 나에게 몇 시에 집으로 갈 것인지 물었다. 밤늦게 혼자 가는 길을 무서워해서 동행을 구하려던 것이었는데, 누나와 단 둘이 도란도란 떠들면서 집에 갈 수 있는 찬스였다. 누나가 물어볼 때마다 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설렜다. 각자의 집으로 헤어져야 하는 플랫폼에서 누나는 어리버리 집으로 가는 방향도 못 찾고 자주 헤맸다. 그걸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광대뼈가 올라갔다.     


군대에서 남아도는 시간 내내 나는 내가 좋아했던 동기와, K누나를 번갈아 떠올렸다. 그 마음들은 자주 헷갈렸다. 두 사람을 모두 사랑했던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 모두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인지. 내가 그토록 가벼운 사람인지. 복잡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절망하기도 했다.      


나는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사랑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모든 호감들이 사실은 ‘사랑하지는 않는 마음’들이었다. 사랑하지는 않았으나 무척 좋아했던 마음. 그것이 무겁고 또 가볍게 마음속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의 정체였다. 끓지 못한 70도씨, 80도씨, 96도씨의 물 같은 마음들. ‘그 정도면 데일 듯이 뜨겁긴 하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자괴감도 들지 않고, 부끄럽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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