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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r 25. 2021

물속의 달&문학살롱 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펍 “문학살롱 초고”는 지하철 역에서 겨우 5분 거리이지만 샛골목에 있어서, 술주정뱅이들이나 무뢰한들이 토요일 밤이라 해도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집 손님들이 꽤 많긴 해도, 대부분이 매일 저녁 같은 자리에 앉아, 맥주 못지 않게 독서를 즐기려고 오는 단골들이다.


어떤 펍을 특별히 왜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맥주 얘기부터 하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내 경우에 “문학살롱 초고”가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흔히들 말하는 ‘분위기’때문이다.


먼저, 이 집의 건축과 인테리어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살롱과 닮아있다. 끈적한 유리로 덮인 촌스러운 테이블이나 싸구려 냅킨 케이스도, 다닥다닥 붙은 좌석들도, 닭뼈를 뱉는 스테인리스 통도, 진하게 배인 끈적한 기름 냄새도 없다.


나뭇결을 잘 살린 목재 서가, 바 뒤편의 책꽂이, 은은한 조명과 타자기, 벽돌로 된 벽과 회색빛의 천장, 높이가 제각각 다른 테이블과, 푹신함 및 크기가 각기 다른 의자들이 하나같이 최고급은 아니라도 싸구려에 비할 바가 못되는 양품이다.


주방과 붙은 쪽에는 바 테이블이, 안쪽에는 마주 보며 둘씩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석이 있으며, 셋이서 앞쪽을 바라볼 수 있는 푹신한 소파 자리도 배치되어 있다. 독특한 것은 내부에 아주 크게 자리잡고 있는 거울이 있다는 점, 그 뒤로 은밀하게 반쯤 숨겨진 독립된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는 점이다. 이 거울과 뒤편의 독립 좌석은 공간감을 넓혀주는 동시에 어떤 재치까지도 전해준다.


“문학살롱 초고”는 언제나 조용해서 대화를 나누기가 좋다. 이 곳에는 라디오도 피아노도 없으며, 언제나 세심하게 선곡 된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대체로는 차분하고 감성적인 팝송이나 연주곡이다. 악기가 많이 쓰이고 리듬이 빠른 곡의 노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없던 추억도 회상하게 만들만한 잔잔한 노래들이 귀를 거의 적신다. 그곳에 앉아있다 보면 어느새 귀에 꽂은 이어폰 마저도 빼고 싶어진다.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잠긴다.


거의 혼자서 일을 하는 펍의 주인은, 손님들에게 섣불리 말을 걸지 않는다. 필요한 말만, 필요한 순간에 한다. 가게가 한가할 때는 책을 읽으며 가게 안쪽으로는 쉽사리 시선을 건네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장사에 관심 없는 한량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그것이 초고의 손님을 위한 세심한 배려임을 안다. 혼자서 자기만의 시간에 빠지고 싶은 손님들에게 혹시 모를 부담감을 전해주기가 싫은 것이다.


‘초고’는 술과 커피를 파는 펍이면서 음식을 파는 식당이기도 한데, 식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이곳의 파스타다. 결코 싼 가격이라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배짱 좋게 비싸지도 않은 금액으로 제공되는 파스타는 이 집만의 별미라고 할 수 있다. ‘냉이 알리오올리오’라든가, ‘포르치니 파스타’를 먹어보면, 그 퀄리티에 눈을 한번 동그랗게 뜨게 된다. (나는 때로는 냉이 알리오올리오가 먹고 싶어서 이 집을 찾는다.) 재미있는 것은, 한 명이 파스타를 시키고 나면 그 고소하고 향긋한 향기가 펍 전체에 퍼져서, 파스타를 시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는 것이다. 주인은 의도하지 않았을 이 파스타 열풍은 그를 조금 민망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좋은 맛이다.


이 집이 여타의 다른 펍들과 구분되는 것은 분위기나 파스타 때문만은 아니다. 시를 컨셉으로 하는 칵테일이야 말로 ‘초고’의 가장 큰 정체성이라 할 만한데, 칵테일을 시키면 그 술의 모티브가 되는 시집을 같이 내어준다. 펍에서 술과 시를 같이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라 할 만 하다.


문학살롱 초고를 찾는 누구든,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는 어떤 신비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건 입구 동선의 영향이 큰데, 나는 이런 구조의 술집은 초고에서밖에 보지 못했다. 반지하에 자리잡은 이 술집의 문은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캄캄한 모양새인데, 문을 열면 안의 구조를 한번에 파악할 수 없도록 들어가는 길이 구불구불 꺾어져 있다. 입장객은 문을 열고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가 미로같은 길을 따라서 다시 왼쪽으로 돌게 되는데, 그러면 주인이 직접 골라 비치해둔 책들이 보이고(파는 것들이다.) 그 길의 끝에 다다라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야만 비로소 펍 내부에 들어올 수가 있다. 실제로 방문해보면 그렇게까지 복잡한 구조는 아니지만, 아무튼 독특하며 이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직접 와보는 수밖에 없다.


문학살롱 초고는(적어도 서울 지역에서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펍이다. (경기도 외곽이나, 지방의 경우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 좀 다르다)


그런데 이제는, 명민하고 냉정한 독자라면 이미 간파했을 무언가를 밝힐 때가 되었다. 이 글이 조지 오웰의 ‘물속의 달’이라는 글을 패러디해서 작성했다는 점이다. 그가 쓴 글에서 ‘물속의 달’의 함정은 그런 펍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펍에 대해서 쓴다고? 그렇다. 말 그대로 ‘물속의 달’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취향과 이상대로 상상 속에 구현된 술집일 뿐이었다.


그는 글의 말미에,

말하자면 그런 이름(‘물속의 달’)을 가진 펍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나는 그곳에 대해 모르며, 그런 장점들만 두루 갖춘 펍이 진짜 있기나 한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자신있게 덧붙이자면, 문학살롱 초고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 이곳에 방문하고 싶은 자라면 누구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에 내려서 ‘문학살롱 초고’를 찾아갈 수 있다. 어디까지나 현실에 실존하는 곳이며, 화요일을 제외하면(또는 계획없는 휴무, 외부행사 날을 제외하면) 언제나 단출한 모양새로 영업하고 있다.


문학살롱 초고를 즐겨 찾는 손님으로서, 술과 책을 함께 하는 것을 행복해하는 낭만적인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펍이 오래오래 같은 자리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서울에서 이토록 뚜렷한 철학으로 영업하고 있는 가게가 재정난으로 폐업한다면 나는 무척이나 슬플 것이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하지만 너무 붐벼 내가 헛걸음을 하지 않을 정도로) 초고를 찾아 비싼 음식들을 마구마구 시켜주면 좋겠다. 솔직한 욕심으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조용한 펍으로 남아있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그건 너무 이기적인 바람일 것이다.


서울 마포구 독막로2길 30


이 글은 조지 오웰의 에세이 '물속의 달'을 패러디 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전문은 링크로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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