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Jul 01. 2023

연애를 글로 배울 수 있을까

연애를 글로 배웠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스무 살의 나에게는 딱히 대안이 없었다. 싸이월드에 떠도는 연애 조언이라든가, 네이버 블로그, 지식인을 통해 그럴듯한 정보들을 막 섭렵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방법론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답장 시간 2배 법칙’은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문자를 할 때 상대방보다 무조건 두 배 늦게 답장해서 여유 있는 아우라를 보이는 동시에 상대에게 긴장감을 주는 기술이었다. 5분 뒤에 답장이 오면 나는 10분 후에 답장하고, 2시간 뒤에 답장이 오면 나는 4시간 뒤에 답장하는 식이었는데, 이를 통해 연락의 주도권을 내 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진짜 여유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방법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알람까지 맞춰가면서 그 방법을 충실하게 실천했다. 연락이 더 잘돼도 모자랄 판에, ‘답장 시간 2배 법칙’을 엄격히 실천할수록 점점 대화의 간격은 멀어져만 갔다. 2010년 어느 날, 내가 4일이나 기다렸다가 답장을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는 아직도 회신이 오지 않고 있다. 당장 내일 그녀에게 카톡이 온다고 해도, 나는 2050년쯤에야 답장을 할 수 있다.


네이버 블로그에서는 <헌팅 술집에서 먹히는 멘트 모음> 같은 글을 읽었는데, “여기서 재밌어 보이는 사람은 저랑 그쪽밖에 없네요. 한잔할래요?”라는 문장이 뭔가 쿨해 보여서 달달 외운 적도 있었다. 진짜 헌팅 술집에서는 “여기서 재밌는, 사람은, 아니, 그, 재.밌.어.보.이.는. 사람이 저랑 그쪽이랑…” 이 모양으로 알아들을 수 없게 버벅이다가 “머라거여? 걍 가세여.” 하는 소리를 듣고 뒷걸음질로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쪽팔려서 술도 안 취하는 날이었다.


눈 피하는 건 찌질한 남자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여자의 왼쪽 눈만을 강렬하게 쳐다보라는 조언을 그대로 따라 했다가 같은 과 누나한테 “뭘 꼬라 보냐”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고… 아무튼 별일이 많았다.


사람의 특성에 따라 공략법이 다르다는 글도 흥미롭게 읽었다. 누가 봐도 예쁜 여자에게 예쁘다는 칭찬은 별로 효과가 없으니, 차라리 무례하게 행동해서 인상을 남기라고 했다.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는 '나도 그 마음을 잘 안다'고 섣불리 공감대를 형성하지 말고, 그냥 그 상처에 대해서 충분히 궁금해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했다. 과도하게 치장을 한 여자에게는, 특별히 힘을 준 액세서리나 화장에 대해 디테일하게 칭찬을 하는 게 좋다고 했고, 수줍고 수동적인 여자에게는 확신에 찬 당당한 태도로 리드를 하는 게 좋다고 했다.


그런 걸 막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으면, MIKA의 <Grace Kelly> 가사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I could be brown, I could be blue, I could be violet sky, I could be hurtful, I could be purple, I could be anything you like"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갈색이든 파란색이든 보라색이든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사랑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고 애원하는 세일즈맨이 된 기분이었다.


맞춤형 공략법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고, 그 이론의 힘으로 이목구비가 진한 글래머의 여성분을 사귀게 된 적도 있었다. 파산 직전의 영세 건축 사무소에서 오로지 클라이언트 입맛에 따라 괴상한 주택을 짓는 일처럼, 상대방의 니즈에 나를 완전 구겨 넣어 달성한 결과였다. 나는 그 연애에서 나라는 본질은 갖다 버리고, 그녀를 위한 남자친구 배역으로서만 존재했다.


그 연애에서 나는 그녀의 지적, 문화적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한 4차원의 예술가 컨셉을 견지해야 했는데, 그건 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말론 브란도와 같은 메소드 연기가 필요했다. (하루키를 제일 좋아한다 했지만 <상실의 시대>도 <해변의 카프카>도 모르는 그녀였다) 이따금 날아다니는 토마토를 잠자리채로 수확하는 농장, 달이 네모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내키지 않을 때도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줘야 했다. 대화 중에 딴청을 피우는 '척' 해야 했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내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야 했다. 만남이 계속될수록 허상의 4차원 예술가는 흐려지고, 나의 본모습이 꿀렁대며 스며 나왔다. 그녀가 좀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도 더 이상 그녀의 예쁜 얼굴만으로는 그 이상한 노력을 계속할 수 없었다. 카운트하기 애매할 정도로 짧은 연애는 그렇게 끝났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유치한 조언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공통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핏 한심해 보일지라도 연애 조언 글에는 어느 정도 본질적인 의미가 녹아있었던 것이다. 답장 시간 2배 법칙에는 '연락에 목매는 사람은 멋지지 않다'는 교훈이 담겨 있었다. 헌팅 술집 멘트라든지 왼쪽 눈 쳐다(꼬라)보기에는 자신감 있는 태도의 중요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매력 있는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매력이 있어야 했다. 그건 어설픈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다. 그냥 자신감 있게, 유쾌하게, 나답게 사는 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다는 걸 천천히 알게 됐다. 찌질한 나에게는 그런 글들마저도 도움이 되긴 된 것이다.


글이나 사례로 어느 정도 배울 수 있는 거라면 왜 공교육에서는 연애를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적잖이 원망스럽다. 기술 가정 시간에 수나사와 암나사, 허브와 베어링의 원리, 식탁보 만들기, 응접실 꾸미기 같이 쓸데없는 거 알려줄 시간에 현업에서 연애하고 있는 대학생 형 누나들을 강사로 초빙해서 좀 알려주지. 알콩달콩한 지난주 데이트 썰이라든가, 부담스럽지 않게 고백하는 법 등. 비슷한 눈높이의 멘토가 사랑의 달콤함과 진실된 마음의 힘 같은 걸 설명해줬다면. 내가 답장 2배 법칙 같은 걸 따라 하면서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연애를 글로 배울 수 있을까. 실전의 무언가를 글로 배운다는 게 가능할까. 질적이든 양적이든 아무튼 나는 평균만큼의 연애는 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연애를 글로 배웠다고 말해도 괜찮은 거 아닐까. 연애를 글로 배울 수 있다면, 싸움도 글로 배울 수 있을까. 사랑도 글로 배울 수 있을까. 죽음도 글로 배울 수 있을까. 육아도 글로 배울 수 있을까. 그 모든 게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거라면, 글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마라탕을 잃어버린 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