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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당 개 n년 차 Apr 01. 2024

감성을 일으키는 것들

#14. 나를 과묵하게 한 감성

 다녀와서야 미술관, 박물관을 다시 방문해 "제대로 즐기고 싶다."는 생각들을 했지만, 당시엔 위 사진들처럼 유명한 조형물이나 그림과 인증샷을 찍는 데에, 넓은 미술관 안에서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앉아서 쉴 곳을 찾는데에 바빴다. 그랬으면서도 여행 동안의 각 도시의 유명 박물관, 미술관 입장료에 대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국제학생증 할인 등을 활용하긴 했지만) 다만, 우리나라의 박물관, 미술관을 생각하며 비교했을 때, 감성이 일었던 것 같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들어가며, 입장료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고, 아깝다는 생각도 당연히 없었는데, 당시 서울의 '경복궁'에 입장료가 있다는 사실엔 놀랐다.(심지어 매우 저렴했으며, 루브르 박물관과 비교해도 당시에 약 10배(?)가 차이 났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부끄러움과 함께 여러 감성들이 일었다.

경복궁, 태조 4년에 수도 이전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며, 최근까지도 수많은 훼손과 정비를 견뎌오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데, 솔직하게 입장료를 아까워했다는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핑계지만 너무 친근해서 그렇게 느꼈는 지도 모르겠다.) 다만, 관련하여 주변에 물어보거나, 인터넷 등을 찾아보았을 때, 나의 처음 반응이 흔한 반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부끄러움을 넘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단순히, '문화의 차이'로 역사적인 건축물, 미술품 등을 감상하기 위해 '돈을 낸다'는 문화가 한국에선 어색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나아가 건축, 예술의 발전을 생각한다면 '돈'이 아니라도 '대가'를 지불함이 마땅하며, 그것이 인색한 상황이라면, 문화라면,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는 감성이 일었다.


 사실 나의 경우에 한정 지어 특히, 파리에서 '예술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감성들로 이후 한국에서도 자주 미술관, 박물관을 찾았으며, 그에 대한 '대가'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을 전부 파리를 경험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위에서부터(어느 지점부터라고 명확히 정의하긴 어렵지만) 인식을,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1년도에 기회가 닿아 '예술가'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을 자주 들었었다. 우리 모두가 현실'때문에'가 현실'덕분에'로 바뀔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습관을 만들어나가면서 요즘 위인(?)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들을 많이 읽었다. 전술을 가져가 쓰기보다는(패스트팔로어는 싫다.) 그들의 전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궁금했다. 당연하게도 글쓰기와 독서가 가장 많이 보였고, 다음으로 명상이나 운동이 있었고, 그중 나에게 유독 감성을 일으킨 것이 있었는데, '배우는 자세'였다. 조금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면 '내가 모르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에서 감성이 일었다. 마침 당시에 참여했던 창업교육에서도 여러 투자회사들로부터 교육을 들을 기회가 많았는데, 회사를 잘 만들어가고 있는 대표들을 언급하실 때, 자주 강조된 덕목 중 하나가 '배우는 자세, 무지의 인지'였다. 논어에서 공자님께서도 "아는 것을 안다고 하며, 모르는 것을 또한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앎이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내게 온 첫 감성은 '불안'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어디서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너는 참 해박하다.", "잡학(?)다식하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더 많은 것들에 관심을 갖고 말을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앎(?)에 대해서 인지하고 "정말 내가 진짜 다 알고 얘기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나를 들여다봤던 것 같다. 처음의 그 '불안'은 들어맞았다. 내가 말하는 꽤 많은 것들을 나는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고, 내뱉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르면서 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너무 부끄러워서 정말 친한 친구에게만 털어놓고 얘기했다. 이어서 다음 감성으로 '충격'이 찾아왔다. 나를 10년 넘게 봐 온 친구가 "전혀 눈치 못 챘다."라고 말했다. 충격을 넘어서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고, 그 친구에게 바로 "앞으로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친구에게, 나에게 다짐하고 많은 것들이 바뀐 것 같다. 가장 먼저 말수가 줄었다. 어떤 단어, 주제에 대해서 대학원 때처럼 세미나 준비를 하듯 알지 못하면 내가 말을 하지 않게 되고 그에 대한 얘기가 나와도 듣고만 있게 되었다.(물론, 지금도 친한 주변사람들에겐 가끔 못 참고 막 내뱉는다.) 자연스럽게 '경청'을 더 잘하게 되었다. 경청하고 있는 상황이 더 많아져 그 안에서 재미를 찾기도 했다. 가장 많이 달고 살았던 말이 "그게 뭔데?"였다.(지금도 정말 많이 한다.) 어떤 것에 대해 흥미가 생기면 제대로 알기 위해 계속 이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학창 시절로 돌아가 영어단어를 외우듯 메모장에 단어의 정의들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름 '제대로' 알고 나서 내가 누군가에게 제대로 안 것을 얘기했을 때, 나를 들어왔던 사람들은 차이가 없을지라도 나는 새로운 쾌감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또, 아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체감했던 것 같다. 최근까지 부정(?)하고 살았던 '과묵한 남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듯하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하며, 모르는 것을 모른다하는 것, 그것이 앎이다.)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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