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 #18(D+368)
당신은 지금, 무엇을 향해 글을 쓰고 있습니까? –
괴테는 단 한 줄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100만 명의 독자가 예상되지 않는 책은 한 줄도 쓰지 않겠다."
그는 그렇게 선언했고, 실제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허황된 꿈이 아니었다. 명확한 목표였고,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눈앞에 그리는 시각화였다.
나는 무엇을 향해 이 글을 쓰고 있는가?
매일 아침 펜을 들고 필사를 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으며,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저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한 위안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한 문장을 쓰기 위함인가.
괴테의 말이 나를 꼼짝하지 못하게 붙들었다.
100만 명.
그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의 글이 누군가에게 닿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것이다.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선명한 목표였다. 그는 100만 명의 얼굴을, 100만 개의 눈물을, 100만 번의 공감을 상상하며 펜을 들었을 것이다.
키워드가 나를 깨웠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정확한 목표를 시각화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쓰는 글이 누구에게 어떻게 닿을지, 그 사람이 이 글을 읽고 무엇을 느낄지,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눈앞에 그리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오늘도 한 페이지를 채웠다는 안도감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가.
목표 없는 글쓰기는 방향 없는 항해와 같다.
어디론가는 가고 있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괴테는 정확히 알았다. 자신의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100만 명이라는 항구를 향해,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노를 저었다.
나는 어떤가.
매일 쓰지만, 내 글의 항구는 어디인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 문장들을 세상에 내보내는가. 막연히 "잘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는, 단 한 명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다.
명확하게 그려야 한다.
내 글을 읽고 눈물 흘릴 사람을. 내 글을 읽고 용기를 얻을 사람을. 내 글을 읽고 "나도 한번 해볼까" 하고 일어설 사람을. 그 얼굴을, 그 표정을, 그 순간을 눈앞에 그려야 한다.
괴테는 100만 명을 상상했다.
나는? 나는 몇 명을 상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가. 한 명이라도 좋다. 단 한 명이라도, 명확하게 그 사람을 떠올리며 쓰는 글은 힘이 있다. 방향이 있다. 도착지가 있다.
목표는 숫자가 아니라, 마음이다.
100만 명이든, 한 명이든, 중요한 건 그 마음을 향해 정확히 걸어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느냐는 것이다.
한 줄을 쓰더라도, 그 한 줄이 누구에게 어떻게 닿을지 상상하며 쓰겠다고 다짐한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명확한 시각화로. 내가 하는 일, 내가 쓰는 글에 정확한 목표를 그리며 살아가겠다고.
괴테처럼.
100만 명을 상상하지 않으면, 한 줄도 쓰지 않겠다는 그 치열함으로.
당신의 글은 지금, 누구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그 질문 앞에서, 지금 이 순간 다시 펜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