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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엄마 멋지다." 아이의 눈에 비친 나의 뒷모습

by 서강


친구에게서 부고를 받은 건 초겨울 문턱,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던 저녁이었다. 시어머님의 상. 4일장으로 치른다는 소식에 머리부터 복잡해졌다. ‘친정어머니도 아닌데 굳이 4일장 전부를 챙길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은 타인의 불행 앞에서 품어서는 안 될 가장 세속적이고 계산적인 질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 순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계산기가 켜지고 있었다. 동행할 친구들의 명단을 훑었다. ‘A는 감기 몸살로 꼼짝 못 한다지, B는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여행 중이고, C는 4촌 언니가 소천했다고 한다. D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모두 가지 못한다는 소식에 나 또한 얄팍한 안도감을 느꼈다. 모두가 가지 못하니, 나 홀로 그 의무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도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문이라는 것이, 상대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하지만, 실은 함께 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의 존재와 관계를 확인하는 사회적 행위 아니던가. 나 혼자 조문할 생각을 하자는 하자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더 명확해졌다.


사흘 내내 나는 '가야지'와 '가지 말자'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갔다.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결정을 내리던 나인데, 며칠 밤낮을 이렇게 끙끙 앓다니. 핑계와 의무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마침내 발인 전날 밤, 창밖에는 마음처럼 미적지근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 나를 속일 수 없다는 생각에, 홀로 갈 채비를 마쳤을 때였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막내 공주가 불쑥 한마디 던졌다.


"울 엄마 멋지다. 엄마를 친구로 둔 분들은 좋겠다."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텅 빈 장롱처럼 가벼운 나의 마음을 아이의 순수한 말 한마디가 꿰뚫어 본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늘 '사람의 도리'와 '염치'를 가르치면서도, 정작 나의 행동은 상황과 이해관계를 따지는 천박한 계산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던가.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더니,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그 작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빈소에 도착하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이내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못 온다고 하더라. 섭섭해. 아파서 못 온다는 애도 여행 다녀와서 저녁에 잠깐이라도 올 수 있었을 거고, 발인 끝나고 오면 될 것을…" 친구는 감추지 않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 솔직함에 나는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친구들의 사정이 모두 ‘못 올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거동이 가능했고, 시간을 쪼개거나 순서를 바꿀 여지가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친구를 위로할 수 있었음에도, 그 작은 수고로움을 자기 합리화라는 달콤한 포장지로 덮어버린 것이다.


돌아보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혼자 가기 싫다는 핑계를 친구들의 사정으로 둔갑시키려 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바쁜지도 모른다. 불편함이 닥치면 ‘이만하면 됐다’ 거나 ‘나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변명을 찾아내 안심한다.


하지만 사람의 도리란, 결국 계산 없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었다. 아이의 말 한마디가, 비 오는 밤 홀로 나선 나의 발걸음이, 그리고 친구의 서운하다는 솔직한 토로가, 나에게 가장 귀한 가르침을 주었다.


많은 이들이 삶의 고단함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계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디, 내일을 사는 우리가 타인에게 보여줄 '도리'와, 자식에게 보여줄 '등'만큼은 계산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 작은 불편함 속에, 진정한 사람 됨됨이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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