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번호부를 넘기는 게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ㄱ에서 ㅎ까지 빼곡한 이름들.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게 내 자산이라고 믿었다.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이 많을수록 내 삶도 넓어진다고 여겼다. 젊은 날의 나는 숫자를 믿었다. 마당발이라는 말이 싫지 않았다. 요즘 말로 하면 인싸였다. 명함첩도 두툼했다. 모임에 불려 다니는 게 자랑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외롭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집에 돌아오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이에 숫자가 하나씩 얹힐수록 사람은 줄고, 마음은 느려졌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주 웃을 수 있는 사람 한 명이 수십 명의 안부보다 깊다는 사실을. 마음이 맞는 사람 둘이면 인생은 충분히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천 명과 아는 척하는 것보다, 한 명과 속 깊은 이야기 나누는 게 나았다. 매일 연락하지 않아도 마음이 닿는 사람. 새벽에 전화해도 괜찮은 사람. 그런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나는 늦게 알았다.
조그만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길을 걸으면 아는 사람이 많았다. 연인과 손잡고 걸을 때도 멈춰 서는 횟수가 잦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둘만의 데이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대도시에 산다. 수백만 명이 사는 곳이지만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외롭지 않다. 아니, 오히려 편하다.
나를 스쳐 간 인연은 셀 수 없이 많다.
인사만 남기고 사라진 얼굴도 많다. 그러나 내 안에 스며든 사람은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야 만났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나를 바꾸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옆에 앉아 같은 속도로 숨 쉬었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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