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458일]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43
나는 때로 우리가 자신의 삶을 너무 사소하게 여기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느끼곤 한다. - 헤르만 헤세
불청객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노크도 하지 않고, 그냥 막힌 벽을 뚫고 들어온다. 나에게 온 불청객은 남편의 부재였다. 그것은 내가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일상의 벽돌들을—아침마다 함께 마시던 커피 한 잔, 저녁때 들리던 현관 여는 소리, 주말이면 나란히 앉아 보던 TV의 불빛들을—한순간에 와르르 무너뜨렸다.
그런데 정작 무서운 건 그 무너진 자리가 아니었다. 그 잔해 위에서 나 자신마저 포기해 버린 것이 더 무서웠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앞에서 내가 가장 먼저 버린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남편을 떠나보낸 뒤, 나는 삶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다는 표현도 사치다. 그냥 매달려 있었다. 죽기 살기로 매달린 기도는 허공을 울렸고, 술에 기대 지새운 밤은 다음 날 아침의 나를 더욱 추하게 만들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거기 비친 여자는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그 여자에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사는 게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거지."
헤르만 헤세의 문장을 마주하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슬픔에 빠진 게 아니라, 내 삶을 '사소하게' 여기기로 작정한 상태였다는 것을. 슬픔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방패 삼아, 원망이라는 감정 뒤에 몸을 숨긴 채, 신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쌓아온 신앙의 내공이라는 게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도 그때 알았다. 단단한 바위인 줄 알았는데, 햇볕 한 줌에 녹아내릴 살얼음에 불과했다.
그런 나를 수렁에서 건져 올린 건 한 줄의 필사다. 필사는 '흩어진 나를 수집하는 의식'이다.
사람들은 필사를 뭔가 대단한 일로 생각하거나, 반대로 단순히 글자를 베껴 쓰는 노동 정도로 여긴다. 둘 다 틀렸다. 필사는 그저 내면의 기초 공사다. 화려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마음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건 '질서'다. 슬픔은 질서 정연하지 않다. 분노도, 무기력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제멋대로 날뛰며 내 안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그 감정의 파편들을 종이 위에 한 줄로 세우는 일. 그게 필사다.
펜을 잡고 문장을 따라 쓰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내 손이 내 것이 된다. 눈으로 읽고, 손으로 옮기고, 종이 위에 새기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영혼에게 정갈한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이 된다.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 적다 보면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문장이 눈을 거쳐 손끝으로 흐르는 동안, 어지럽게 흩어졌던 감정의 파편들이—그렇게 제멋대로 굴던 것들이—제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펜을 쥔 손에 온기가 돈다. 종이 위로 차곡차곡 쌓이는 문장들은 무너진 내면에 새로운 벽돌이 된다.
나를 사소하게 여길 만큼 힘든 문제 앞에 서있는가,
당신도 할 수 있다. 거창한 다짐 같은 건 필요 없다. 그저 좋아하는 문장 한 줄을 천천히 옮겨 적으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핑계로 스스로를 방치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
나도 그랬으니까. 상처를 핑계로 나를 내팽개쳤으니까.
시련은 선택할 수 없다. 불청객은 내 허락 없이 온다. 하지만 시련 이후의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나"라는 원망에 매몰되어 오늘을 버리고 있는 당신이, 펜을 잡았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필사 노트를 살 필요는 없다. 메모지 한 장이면 된다. 스마트폰 메모장도 괜찮다.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다. '나를 다시 돌보기로 한 선택' 그 자체가 중요하다.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만큼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주인공이 되었으면 한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오롯이 당신만의 시간. 그 안에서 당신은 조금씩 회복될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도움을 받은 당신이 결국 '자신의 삶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필사를 마친 뒤 노트를 덮을 때, "오늘도 나는 나를 지켜냈다"는 안도감을 느끼길 바란다. 거창한 결심은 금세 시든다.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하지만 매일 아침 귀한 문장을 눈으로 읽고 손으로 새기는 감각은 근육처럼 남는다.
얇은 살얼음판 같았던 내면이 어느덧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바다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변한 당신을, 당신 자신도 놀라며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필사는 혼자 하는 고독한 작업 같지만, 사실은 앞서간 성인(聖人)들의 지혜와 연결되는 가장 뜨거운 연대의 시간이다. 당신이 적어 내려가는 한 줄 한 줄은 수천 년 전 누군가의 고민과, 수백 년 전 누군가의 깨달음과, 지금 이 순간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의 눈물과 만난다.
그 조용하고 단단한 걸음에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 무너진 마음의 기초를 다시 다지고 싶은 당신을, 우리의 공간에서 기다린다.
시작은 한 문장이면 된다. 지금, 당신이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를 천천히 옮겨 적어보는 건 어떨까. 그 한 줄이 당신의 오늘을 조금 다르게 만들 것이다.
정말이다. 거짓말 같지만, 정말이다.
https://open.kakao.com/o/gWx0m5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