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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밖에서 손짓하고, 고독은 안에서 손짓한다."

고독을 즐기는 법

by 서강


"외로움은 밖에서 손짓하고, 고독은 안에서 손짓한다."

문득 이 문장이 떠오른다. 나만의 문장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내가 나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언어다. 혼돈의 바다에서 표류할 때마다, 나는 말과 글이라는 나침반으로 길을 찾아왔다. 그것이 내 존재의 뿌리이며, 이 불안한 세상에 내린 삶의 닻이다.


며느리와 폐백 음식을 보러 가기 위해 오랜만에 지하철을 이용했다. 사람들로 빼곡한 지하철, 모두가 바쁘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바쁘다. 혼자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현대인의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았다. 한때 나도 그랬다. 잠시라도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 친구들을 만나고, 모임에 참석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려 했다. 하루를 살아냈다는 느낌을 얻기 위해 발바리처럼 여기저기 나돌았다. 그러나 그건 외로움이었을 뿐, 채울수록 더 공허해지는 블랙홀 같았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 재앙이 닥친다. 나무는 제철에 꽃을 피우고, 강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순리대로 살면 삶이 편안하지만, 순리를 역행하면 삶이 고되다. 이 역행하는 마음은 언제나 욕심에서 비롯된다. 나는 그 욕심을 비워내기 위해 오늘도 필사로 마음을 청소한다.


창밖에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철학전집을 옮겨 적는 시간, 펜이 종이 위를 지나갈 때마다 마음의 먼지가 털어지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지혜를 손으로 옮겨 적으며 나는 조금씩 가벼워진다.


인간의 몸은 온 우주를 닮았다. 별들로 가득한 우주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항상 무언가 채워지지 않아 공허함을 느낀다. 그 공허한 공간을 채우려고 SNS에 사진을 올리고, 카페에서 웃음소리를 내고, 쇼핑몰을 돌아다닌다. 하지만 더 공허해질 뿐, 진정한 충만함을 얻지 못한다.


고독은 오롯이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어색하다. 자신의 결점과 부족함, 아픔과 상처를 마주해야 하니까. 하지만 고독을 즐기면 살아있는 진짜 나를 만난다.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고요해질 때, 비로소 내 목소리가 들린다. 나의 마음을 듣게 되고, 나를 더 깊이 알아가게 된다.


예수님부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혼자서 고행의 길을 걸었다. 광야에서, 보리수 아래에서, 기도하고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사람들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는 종교로 탄생했다. 위대한 통찰은 언제나 고독 속에서 피어난다.


창밖에 병아리처럼 재잘대는 어린이집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 시대를 잘 만나서 의학의 발전으로 150세 시대를 살아내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혼자 있는 시간에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미리 노후 준비를 해야 한다. 독서, 필사, 글쓰기를 발견하고 시작한 것이 참 다행이다. 고독사 하는 게 아닌, 고독을 즐기면서 깨달음을 얻어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이 좋지 않을까. 긴 인생이라면 더욱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를 나답게 하는 길은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에 있다. 책과 글쓰기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내 안의 더러운 것들을 덜어내는 것. 마치 해가 모든 생명에게 빛을 비춰 생명을 살아나게 하듯, 나도 내면의 빛을 찾아 세상에 나눠주고 싶다.


오늘도 나는 언어로 나를 세운다. 아침 필사로 나를 돌아보고 오늘을 살아낼 키워드로 힘을 얻는다. 저녁에는 하루를 정리하는 5년 다이어리를 작성한다. 고독 속에서 진짜 나를 만나고, 욕심을 비워내며 순리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급할 때는 느리게, 불안할 때는 고요하게, 욕심날 때는 비우며.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언어와 고독이라는 두 벗과 함께, 나는 오늘도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계속한다.



KakaoTalk_20250409_091008957_01.jpg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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