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가 권리가 될 때

by 서강


어느 날, 물컵을 들고 있던 내 손이 멈췄다.

언제부터인지 그 컵은 항상 비어 있었다. 매번 채워주는 건 나였고, 마시는 건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목마른 건 나였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네가 워낙 잘해줘서." 마치 내 친절이 당연한 것처럼. 마치 내가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기꺼이 시작했던 일들이 어느새 짐처럼 다가온다. 오늘도 누군가 전화를 걸어온다. 도움이 필요하다며. 나는 여전히 "물론이야"라고 답한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허공을 바라본다. 그때 깨달았다. 호의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처음엔 설렜다. 내가 아는 것을 나누고, 내 시간을 내어주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 그 자체로 충분했다. 마음이 따뜻해졌고,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고마움 대신 기대가 서렸고, 미안함 대신 당연함이 자리 잡았다. 내 호의는 어느새 그들의 권리가 되어 있었다.


"부탁이 있어."

"이번엔 좀 급해서."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이런 말들이 들려올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꺼져간다. 촛불처럼 조용히, 소리 없이. 변화는 갑작스럽게 왔다. 어느 화요일 오후, 평소처럼 누군가를 도와주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주저앉고 싶었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텅 비어 있었다. 거울 속 나와 마주쳤다. 거울 속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지쳐 보였나. 언제부터 이렇게 웃음이 어색해졌나.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잠시 멈춰 서기로.

요즘은 묻는다. 나 자신에게.

"지금 이 마음이 진짜 기꺼움인가?"

"아니면 그냥 습관인가?"


때로는 아니라고 말하는 법을 배운다. 처음엔 어색하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호의는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이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고받는 흐름 속에서만 살아남는다는 것을.


오늘도 누군가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때 나는 내게 질문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정말 기꺼운지를. 그렇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도 때로는 내 컵에 물을 채울 시간이 필요하다고.


호의가 권리가 되지 않는 세상. 서로의 따뜻함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세상. 그런 곳에서 나는 다시 기꺼이 사랑하고 싶다. 그제야 비로소, 내 물컵에도 물이 채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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