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꼭지를 틀면 따뜻한 물이 쏟아진다. 그런데, 물만 흐르는 게 아니었다. 기억도, 감정도, 그때의 내가 함께 흘러나왔다. 찬물에 머리를 감고, 햇볕을 기다리던 그 시절 아이에게 지금의 내가 건네는 작은 인사. 겨울이면 연탄불이 새벽에 꺼져 있는 날이 많았다. 장을 봐오신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를 다시 지폈고, 나는 그 사이, 수돗가에 앉아 세숫대야에 받아놓은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
이마로 흘러내린 물줄기에 소스라치며 입술을 꾹 다물고 바가지로 헹궜다. 그 차가움이 싫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싫다고 해서 누가 따뜻한 물을 만들어줄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찐빵 같이 동그란 입김을 뿜으며 마루 끝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문지르면, 겨우 그때쯤 장판에 온기가 돌아왔다. 햇볕 한 줌 드는 자리를 찾아 등을 대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던 시절이었다.
그땐 몰랐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는 순간이 올 줄은. 요즘은 수도꼭지만 돌려도 따뜻한 물이 나온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잘 맞춘 온수. 세상은 참 좋아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아침의 냉기와 마루 끝에서 머리를 말리던 나를 가끔 다시 떠올리게 된다.
젖은 수건을 목에 걸고 입술을 덜덜 떨며 아무 말 없이 참았던, 그 꼬마. 지금도 나는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가끔, 그 꼬마가 흘려보낸 아침을 떠올린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이 온수는, 마음까지 데우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