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는 길

샴푸 거품이 준 여유

by 서강



펌을 하러 갔다. 출근 전, 잠시 짬을 내다보니 마음이 바쁘디 바빴다. 최화정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며 게스트로 출연한 윤유선 헤어 스타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가을냄새가 나게 해 달라고 덧 붙이면서, 기징이 조금 짧긴 한데 한 번 해볼게요. 오랜만에 하는 펌이라 기대가 컸다.


롤을 감기 시작하고 얼마나 흘렀을까, 부원장은 내게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오른쪽 뒷머리를 신입에게 은근슬쩍 맡겼다. 무슨 이런 일이. 내가 신입 연습용도 아니고 마네킹도 아닌데. 불편한 마음이 팥죽이 끓는 것처럼 부글거렸다.


중화제를 발라놓고 샴푸대에 눕는 동안, 내 속에선 온갖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아우성이었다. '말을 할까?' '아니면 그냥 참고 두 번 다시 오지 말까?' 이런 생각들이 물의 온도보다 더 뜨겁게, 샴푸 거품보다 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뜨거운 물이 머리를 적시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 감정을 알리긴 해야겠는데 어떡하지. 감정에 휩쓸려 목소리나 높이면, 진상 손님으로 남을 텐데. 필사를 통해 태도 관계 지성 기품 사색을 하는 것이 삶이랑 따로국밥이 되고 말 텐데, 무엇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드라이어 바람으로 머리를 손질하고 커트를 하는 부원장에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신입 분 잠시 자리 비켜달라고 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이 말을 할까 말까 많이 고민했어요. "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신입분에게 맡기기 전에 저에게 먼저 상황 설명을 해주고 양해를 구했더라면 제가 충분히 납득을 했을 텐데, 마음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 다음부터 안 오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제 감정을 말씀드리는 게 맞겠다 싶어서요."


내 말을 들은 부원장은 순간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신경 쓰겠습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만약 중화제 바르고 샴푸 하는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내 감정에 솔직해서 서로 기분만 상하고 말았을 거다.


살다 보니 세상이란 참 자주 이런 시험을 내는구나 싶다. 참기만 하느냐, 아니면 터뜨려버리느냐. 그 둘 사이의 좁다란 길, 바로 '제대로 내 감정 말하기'라는 길을 찾는 게 결국 사람이 평생 배워야 할 숙제인 것 같다.


미용실에서 또 하나 배웠다. 화가 날 때일수록 잠깐 숨을 고르고, 내 마음을 차근차근 정리해서 상대방에게 내 입장과 감정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른이 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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