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잡혀있는 산행 약속에 몸이 무거워진다.
오늘의 코스는 북악산.
일반인들 대상으로 산행길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청와대를 뒤에서 감싸는 덕분인지,
산 곳곳에는 군인을 위한 초소가 마련되어 있다.
이 가파른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릴 그들의 무릎에 잠깐의 묵념을.
전 날부터 일기 예보를 보고 약속을 취소해야 하나 좋은 핑계가 떠올랐다.
산에 가기 전에는 항상 그렇다.
그 높은 곳에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다,
정상에서 잠깐의 행복을 느끼고 또다시 힘들게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것보다 더 힘들고 아프기에.
나갈 준비를 마친 직후에도, 지금이라도 다시 아늑한 침대 속으로 뛰어들까 고민이 된다.
거기에다 비까지 온다니, 얼마나 눅눅하고 찝찝한 여정이 되겠는가.
그래도 버스에 몸을 싣고 길을 향한다.
약속은 약속이기에.
관찰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덕분인지,
가는 길이 꽤나 즐겁다.
부쩍 초록빛으로 싱그러워진 세상을 한눈에 가득 담아 본다.
길목마다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꽃들은 오랜만의 잔칫상에 잔뜩 신이 난 듯하다.
나무들 역시 팔을 활짝 벌려 내리는 빗물을 마음껏 마신다.
그들의 감정이 느껴진다.
더 높이, 높은 곳으로 와 우리를 봐주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드디어 내가 미쳐가는 건가.
습기 가득 찬 우의와 함께 산행을 마친다.
신발과 바지에 진흙이 잔뜩 묻어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햇빛이 쨍하던 날과는 또 다른 뿌듯함을 느낀다.
다음에도 비가 잔뜩 내려주길,
아니 머리가 곱실거릴 정도로만 적당히 뿌려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