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은 처음이지만

by 서글


힘들었던 1년 반이라는 짧지만 긴 시간을 뒤로하고, 드디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랑스러워해 주었던 대기업 타이틀을 버린 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실망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설득했다. 내게 붙어 있는 작은 그 명찰이 그들에게도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의 인생을,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임을.




보통 이직을 할 때에는 한 두 달가량의 휴식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직장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고 판단하여 퇴사 다음 날을 입사일로 잡는,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은 후회스럽기도 한 급한 결정을 내렸다. 좋은 문화로 유명한 회사에서는 어떻게 일하는지가 너무 궁금했고, 하루빨리 적응하여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설렘을 가득 안고 출근한 첫날, 으리으리한 고층 건물도 아니었고, 그 내부도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그들만의 색깔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훨씬 답답해지는 것이 맞았지만 오며 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 묻어 있었다.


웃고 떠드는 직원들의 모습, 트렌디하게 꾸며 놓은 내부 인테리어, 친절하게 맞아주는 새로운 팀원들까지. 공간은 작아졌지만 왠지 모르게 나의 마음은 조금씩 트여가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집안이나 거주지, 학벌 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어떤 일을 하다 왔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집중하여 많은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출근하자마자 식사를 하며 자가에 사는지 전세에 사는지를 물어보던 전 직장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전담 도우미를 해주시는 팀원분이 한 달 동안 모든 것을 케어해 주었고, 팀에 부드럽게 온보딩할 수 있도록 팀원들 모두가 심혈을 기울여주는 것이 느껴졌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편안한 분위기에 적응하여 그들의 문화를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서비스 장애가 일어나도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추후 대책을 서로 머리를 맞대며 세우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서로의 탓을 하며 책임을 전가하려는 추잡한 어른들의 모습과는 자석의 양극처럼 상반되어 보였다.


모두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발적으로 프로세스를 개선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일을 잘할 수 있을지 팀 자체적으로도 끙끙 대며 지속적인 보완을 해나갔다.


흔히 느껴지던 정치질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고, 각자의 성과와 성실도에 따라 세세하게 인정받았다. 내가 한 것을 부풀려 말하지 않아도, 리더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여겨보며 부족한 부분은 북돋아주며, 잘하고 있는 부분은 내세워 주며 선순환을 만들고 있었다.




첫 회사에서 받았던 상처와 무기력증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도 그 기업의 일원이 되어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내 일이 아닌 것이라도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며, 점점 더 나은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회사는 결국 존재하는 것이었고, 회사는 다 똑같다던 그들의 말은 틀렸다는 것을 몸소 증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더욱 성공해야 하고, 더욱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내 야망은 꿈틀대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회사에서 기술적으로도, 직장인으로도 성장할 수 있으니, 이 것을 발판 삼아 다음 목표를 이리저리 찾아보고 있었다.


엔지니어라면 누구나 꿈꾸는 해외 빅테크 기업에 가야겠다는 목표가 생겼고, 이 작은 회사에 적응해 나감과 동시에 그 목표를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은 욕심이 싹트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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