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사는 따라가는 게 아니라던데요

by 서글

동기에게 온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년에 자신이 속해있는 조직이 분사를 하게 되었는데, 신사업을 추진해 볼 수 있는 팀의 TF장으로 발령받게 되었다고. 그 TF팀에서 함께 일할 만한 주니어들을 수소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바로 식사 약속을 잡아 자세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이직을 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차피 나갈 거라면 자기와 함께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꽤나 혹하는 제안이었다. 우선 중고신입으로 다운그레이드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분사를 따라가게 되면 오히려 연봉은 오를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 동기는 평소에도 존경의 마음을 담아 바라보던 모범이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성품이 곧고 똑똑하여 벌써 자신의 조직에서 성과를 인정받아 TF장이라는 작지만 책임은 강한 리더의 자리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채 안되어 오를 수 있던 사람이었다. 밑바닥부터 서비스를 하나하나 만들어나갈 수 있고, 조직의 분위기도 IT서비스 회사에 맞추어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를 한 층 깨어내고 새로운 문화를 나갈 예정이었다.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우선 답변을 주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 조건들을 비교해 보았을 때, 추후 이직을 할 수 있는 경력을 쌓아갈 수도 있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일부러 내려놓지 않아도 되는 더 좋은 선택지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아예 회사 밖으로 나가는 대신, 큰 그룹 안에서만 이동하는 퇴사 아닌 퇴사를 하게 되었다.


분사에 대한 괴담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몇 년 이내에 성과급이 사라질 것이다, 연봉이 동결될 것이다 등 온갖 부정적인 소문이 사내에 맴돌았다. 원래 해당 조직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분사에 따라가지 않고 남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굳이 좋은 철밥통을 스스로 걷어찰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다른 조직에서 따라가는 나를 두고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며 뒤에서 수근 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내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도전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제자리에 앉아서 용기 있는 사람을 헐뜯기 바쁘다는 것을 이른 나이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퇴사면담을 진행했던 팀장님조차도 해당 조직을 비하하며 사실상 버리는 카드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무조건 후회한다는 말을 실제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강한 신념을 가지고 내뱉고 있었다. 사내 게시판은 분사로 인한 이야기로 불타올랐다. 노조는 복귀 조건을 지켜내야 한다, 몇 년치 성과급을 인정받아야 한다 등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곳에서 4년간 일한 후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선택지도 주어졌다. 물론 우리는 그 선택지를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보따리를 챙겼긴 하지만 말이다.


온갖 어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든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부류, 어떻게든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부류, 자신 이외에는 어떠한 관심도 없는 부류. 1년 차에 겪은 사회의 모습은 잔인하리만큼 냉정했고, 나는 조금씩 그곳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생존본능 덕분이었을까. 학창 시절 꿈꾸던 아름다운 사회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고, 회색빛의 콘크리트 건물 밑에 존재하는 검은 개미들만이 먹고살기 위해 하루 바삐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다양한 모습을 보며 일말의 정조차 떨어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올 수 있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큰 도전이었다. 갑작스레 내밀어준 구원의 손길 덕분에 더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새로이 계약서를 쓰기로 한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메일을 보내고 업무 전화를 하며 보내는 나날들이 뒤편에 서류들처럼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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