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신의 직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그런 곳을 다녀도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행했다.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던 취준생 시절보다. 그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을 변화시킬 서비스를 만들고, 뛰어난 팀원들과 열정 넘치는 토론을 하며 어느새 시간이 지나 늦은 밤이 되어 퇴근을 해도 행복할 것만 같았다. 내가 가진 가능성이 무한해 보였고, 갈 수 있는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나를 즐거운 고민에 빠지게 할 것만 같았다. 합격한 여러 회사들 중 하나를 고르던 그때처럼.
대기업의 나는 작은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했다. 언제든 교체 가능한, 어느 날 사라져도 티도 나지 않을 아주 작은 부속품 하나였을 뿐이다. 개성은 튀어나온 못이 되기 마련이었고, 밤을 새워서 준비한 제안서는 왜 일을 벌이냐는 따가운 눈초리로 돌아왔다.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뉴스 클립을 모아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작은 사내 게시판에 올라가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쓰는 서비스를 만들고자 했었던 나를 차가운 현실이 비웃듯이 맞아주었다.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나에게 메일 발송, 외주사와의 유선 연락, 문서 작성 등의 업무들이 맡겨졌다. 학생 때 바쁜 시간을 쪼개어 겨우 따냈던 자격증들이, 각종 대외 활동과 공모전에서의 수상 경력들이 뒤에서 나를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듯했다. 우리의 역할은 회사에 너를 집어넣기 위함이었다고. 이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 거라고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 날밤을 지새우며 함께 프로젝트를 했던 그 시절들이 스쳐 지나갔다. 주마등처럼 짧고, 강렬하게 흘러갔다.
하루 일과는 비어있는 메일함처럼 충분히 여유로웠다. 출근을 하면 우선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사러 나간다.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음료와 함께 수다를 떨다가 올라와 메일이나 쪽지가 와있는지 확인한다. 있다면 답장을 준다. 업무를 요청하는 내용에는 팀원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지만, 우리의 역할이 아니니 다른 팀이나 담당자에게 넘기라는 답변을 듣고 그대로 전달한다. 아무것도 와있지 않다면 캘린더나 인트라넷을 뒤적 거린다. 어느새 열한 시가 되고 막히는 엘리베이터를 피하기 위해 조금 일찍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점심을 먹고 또 음료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한 시 반. 자리에 돌아와 업무를 진행한다. 세네시쯤 팀원이나 동기에게 또 커피를 마시자는 요청이 오고, 벌써 세 번째 음료를 들이킨다. 돌아와 업무를 어느 정도 정리하다 보면 퇴근할 시간이 다가온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붐비는 퇴근 시간을 피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지나고 보니 좋아 보이는 모습도 분명히 있다. 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충분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다. 칼퇴근을 할 수 있고, 충분한 휴식시간, 식사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바라던 직장인의 모습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밥 먹을 시간 없이 바빠도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 칼퇴근을 하지 못해도 좋은 동료들과 회의를 하며 사업을, 서비스를 고도화시켜 나가는 것, 일이 가득 밀려 있어도 성과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것, 유저들의 피드백으로 돌아오는 것, 그런 것들이 내가 바라던 회사의 모습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했다. 그러면 성장은 할 수 있겠다는 말. 바쁘면 여유로웠던 지금이 그리워질 것이라는 말. 네가 그런 곳에서 일을 안 해봐서 그렇다는 말. 행복은 회사 밖에서 찾으라는 말. 각양각색의 사람만큼 다양한 의견이 돌아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료하고 답답하다는 것, 내가 그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내 것이 아닌 경험에 중요한 결정을, 미래를, 인생을 베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았다. 이른 나이에 모든 것을 다 가진 것만 같았던 사회생활의 시작이었지만, 그곳은 늪처럼 나를 천천히 조용하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더 이상 꿈을 꿀 수도 없게 두 눈을 가린 채로 말이다. 주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와줄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 같은 모습을 한 채, 오히려 누군가는 가라앉는 그 순간을 즐기는 듯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나를 구원하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퇴사 면담은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