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2024년 10월 10일,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로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했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님의 소식이었다. 이미 부커상을 비롯해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만큼, 문학계에서는 그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그녀의 이름은 익숙하지 않았다. 문학에 무심했던 나에게 노벨상이라는 거대한 상은 그저 '아인슈타인 정도 되는 사람이 받는 상'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뿐이었다. 노벨상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위엄이 그녀의 이름 위에 덧입혀져, 처음엔 어찌 된 일인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한강 작가님의 수상 이후, 인쇄소들은 분주해졌고 그녀의 책은 빠르게 품절되었다. 나도 그 열기에 이끌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와 <소년이 온다> 두 권을 구매했다. 정작 노벨상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는 선택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혹은 반대로 너무 유명한 작품은 읽고 싶지 않았던 모순된 감정에서 나온 결정이었을 것이다.
책은 꽤 늦게 도착했다. 2주쯤 기다렸던 것 같다. 빠른 배송은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책을 읽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묘하게 들떴다. 동시에 지금껏 책을 멀리했던 내가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펼쳤다. 나는 이 책을 가볍게 읽어낼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영화도 여러 편 봤고, 관련 자료도 검색해 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이 책은 내 안의 의지를 시험했고, 감정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나는 섣부르게 축제 분위기에 뛰어든 방관자에 불과했다. 책을 덮고 다시 펴기를 반복하다가 6장에서 덮은 뒤로 다시 펴지 않았다.
수개월이 지난 후, 유튜브 콘텐츠로 독서 습관 들이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도파민 중독자라 여길 정도로 집중이 어려운 나에게는 강제성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100일 동안 10권 읽기'를 선언했고, <소년이 온다>를 두 번째 책으로 선정하며 다시 꺼내 들었다.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구조 덕분인지, 읽어야 한다는 동력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데 3주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바쁜 일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책의 내용 자체가 나를 자주 멈춰 세웠다. 문장 하나하나가 곱씹지 않을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고, 차마 인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장면 장면이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출퇴근 길, 지하철 안에서 책장을 넘기다 손끝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이 책은 그렇게 깊숙이, 조용하지만 강하게 나를 파고들었다.
이 소설은 여섯 개의 장과 작가 자신의 기억이 담긴 짧은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마다 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시선으로 1980년 5월의 광주가 펼쳐진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이야기의 무게가 가슴 깊숙이 내려앉는다. 마치 작가가 조용히 우리의 손을 잡고 그날의 시간 속으로 데려가는 듯한 기분이다. 누군가의 목소리였고, 또 누군가의 고통이었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오래된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조용히, 아주 천천히 그 시간을 애도하게 된다.
작년 12월 3일,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가 있었고, 비록 6시간 만에 철회되었지만 국민들은 다시금 민주주의의 위기를 체감해야 했다. 나는 그날 밤 <소년이 온다>의 장면들과 겹쳐 보이는 현실을 떠올리며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슬픔에 잠겼다. 대선이 치러지던 시점에 이 책을 읽으며, 당선인에 따라 달라질 대한민국의 앞날에 대해 더욱 신중하게 고민하고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이 책은 내게, 투표의 무게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각인시켜 주었다.
‘절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계엄이라는 말은 이제 내게 단순한 정치적 용어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떠올리며, 그런 일을 자행했던 자들과 이를 옹호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가 마음 한편에 남게 됐다. <소년이 온다>는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었다. 고통을, 존재를, 기억을 응시하는 책이었다. 그녀는 한 시대의 비극을 통해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존엄을 되묻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