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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ha Jan 11. 2023

스타벅스 커피를 흘리지 않는 법



  대학교 1학년 때 제주도에서 제일 큰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지금은 잘 없는 경양식 레스토랑인데, 나름 고급 콘셉트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첫날 가장 먼저 세 손가락으로 트레이를 받쳐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고, 익숙해지면 여기에 물이 담긴 컵을 올려 서빙을 한다. 속도가 붙고, 일이 좀 더 익숙해지고 나면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서빙한다. 경양식당에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가장 저렴한 돈가스만 하더라도 사이드 디쉬, 메인디쉬, 밥, 빵 접시 등 다양하게 제공이 된다. 음식이 나오는 순서에 따라 서빙하면 되기 때문에 여기까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난도가 가장 높은 일은 음식을 다 먹고 나서 후식을 제공하기 위해 테이블을 정리할 때다. 커트러리는 볼록한 그릇에 놓고, 평편한 그릇에 비슷한 사이즈 그릇을 올려 쌓은 다음 양손으로 균형을 맞추고... 최대 4인의 식기를 다 정리하고 두 손에 가득 쌓아 거의 곡예를 하듯이 들고 가야 한다. 이 엄청난 양의 그릇을 깨지 않고 주방까지 가져가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훨씬 더 부담인 건, 이 모든 과정을 손님들이 매우 집중하며 보고 있다는 거다. 수십 개의 그릇을 깨는 일련의 과정 끝에,  어느덧 나는 아이들이 손뼉 치면서 바라볼 수 있을 경지에 오른 베테랑이 되어 있었고, 이후 자기소개 특기란에 '서빙'이라고 적을 정도로 스스로 자부심도 느끼고 있었다. (엄마는 고생을 자랑으로 여기지 말라곤 하셨지만)

 

 그 이후 이모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나, 잔치집에서 서빙할 때, 하다못해 친구네 집들이를 할 때도 나의 그릇 묘기는 종종 사람들의 눈요깃거리였다. '서빙 요정'이라며 누군가는 조롱하듯이 얘기했지만 나는 단순하게 칭찬으로만 인식했고, 한 때 일잘러였던 사실을 한번 더 상기시켜 주며 '나 이런 것도 잘해~'라고 으쓱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나의 서빙 요정 명성에 흠집이 생겼다. 바로 스타벅스에서.


  대기업의 인심이 이렇게도 후했나 싶을 정도로 스타벅스는 아메리카노를 컵 가득 채워준다. 생각보다 많은 양에 감격하기도 잠시, 곧이어 대참사가 일어난다. 서울의 스타벅스는 보통 1층에서 주문해서 2~3층에 올라가 음식을 먹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계단을 오르는 과정에서 무조건 커피를 흘리고 당황하는 순간 아수라장이 된다. 자리에 앉으면 이미 트레이엔 커피가 흥건하고, 커피의 양은 적어도 몇 모금 줄어있다. 이건 인심이 아니라 사실은 손님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거라며 혼자 씩씩대다가도 서빙 베테랑인 나도 이런 마당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 너무나 궁금했다.


  오늘은 좀 더 비장한 각오로 스타벅스로 향해 크림치즈 베이글과 오늘의 커피를 주문했다.  '오늘은 절대 흘리지 않겠어'라고 각오를 다지며 메뉴를 기다렸다. 출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아 각오를 다지고 머리를 굴려 전략을 짜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분 정도 기다린 끝에 나온 메뉴. 중심을 잘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필라테스 수업에서 배웠던 코어에 힘을 주고,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며, 약간의 흔들림에도 당황하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그리고 오늘, 자리에 정착하는 순간까지 드디어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고 처음으로 정량의 오늘의 커피를 마시는 날이 되었다.

   

 나는 요즘 이렇게 다소 엉뚱하게 산다.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소소한 재미와 행복.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생각하는 삶. 누군가는 오두방정 떤다고 볼 수 있겠지만 개의치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나만의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퀘스트를 깰 때마다 느끼는 희열들이 조금씩 뭉쳐지며 나의 날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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