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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ha Apr 03. 2023

봄의 향연

길었던 겨울이 지나 봄이 왔다. 단어만으로도 마음에 묵직한 무언가가 들어선 느낌이다. 노는 게 마냥 좋았던 어린 시절엔 봄이 '시작'이라는 의미를 피부로 가장 크게 느끼게 해주는 수단이었다면, 어느새부턴가 '봄'은 목적이 되어버렸다. 


 생각이 많던 시절, 왕가위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들었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라 했다. 그 해부터 난 많은 일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한 것만 기억했다.'


이 말을 나만의 방식으로 각색해 '2019년 봄, 나는 많은 일을 잊고 3월 29일에 벚꽃이 만개한 것만 기억한다'라고 다짐했는데 봄만 되면 자꾸 2019년 유난히도 만개했던 벚꽃나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이후 코로나가 터지고, 퇴사를 하면서 봄의 낭만을 크게 즐기지 못했지만 이번 봄은 좀 더 느껴보고 싶었다. 이번 봄은 어떤 것만을 기억할까.


 주말마다 하고 있는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뭔가 아쉬워 광화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덕수궁 길을 걷기엔 시간이 좀 애매하고, 교보문고나 가서 책 좀 보다 올까 싶어 정말 오랜만에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스무 살 무렵 서울에 오자마자 갔던 곳인데 그 이후로 뭔가 기념하고 싶은 날엔 저절로 교보문고가 떠오른다. 주말이라 그런지 북적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이 책을 읽을까 저 책을 읽을까 신나게 고민하고, 결국 빈 손으로 집으로 가는 건 어쩌면 늘 똑같은 레퍼토리다. 




 읽고 싶었던 책을 사지는 못했지만 살짝 들여다보고 해가 조금씩 저물 무렵,  미세먼지가 어느 정도 걷히고 공기가 꽤 부드러워졌다. 교보문고 야외 광장엔 큰 벚나무가 꽃잎을 흐드러지게 떨어뜨리고 있었다. 구경하고 사진 찍는 사람들 틈에 들어가  하염없이 벚꽃들을 바라봤다. 작년까지만 해도 벚꽃을 보면 좋으면서도 뭔가 울컥함이 있었다. 그 울컥함은 늘 나를 옥죄고, '나 정말 괜찮은 걸까?'라는 걱정과 뒤섞인 감정이었다면 올해는 울컥함보다는 그냥 편안했다. 당장 갖고 있는 고민들에 대한 해결책도 없고 믿는 구석도 없지만 그냥 내 마음이 편안했다. 오히려 각박하고 치열한 서울에서의 생활과 '내'가 조금 분리가 된 느낌이었다. 고민해 봤자 해결되는 건 없는데 올해는 그냥 즐기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봄이 설레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무엇보다 마음에 봄이 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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