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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ha Aug 26. 2023

나만의 케렌시아, 노꼬메

고민과 걱정들은 다 노꼬메에 버리고 옵니다.

  나는 공간의 기운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컨디션이 그리 좋진 아니지만, 그래도 내부는 나만의 것들로 채워 에너지를 얻는다. 어릴 적 엄마는 분기마다 한번씩 가구의 배치를 바꿔놓았다. 하교를 하고 집으로 왔을 때 달라진 분위기는 마치 새로운 곳에 이사를 온 것 같았다. 공간만 살짝 바꿨을 뿐인데도 마음이 참 몽글몽글했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공간이 주는 힘을 믿는다.


 공간에 집착하는 나에게 '케렌시아'는 참 낭만적이면서도 내가 찾아 헤매던 단어였다. 케렌시아(Querencia)는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로, 투우장의 소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홀로 잠시 숨을 고르는 자기만의 공간을 의미한다. 방송을 하면서 제주의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어딜 가나 아름답고 멋있다고 느꼈지만 특별히 내 마음에 착 붙어, 위로를 주는 공간이 있었다. 나만의 케렌시아가 되었던 곳은 바로 '노꼬메 오름'이다.


 애월 중산간에 위치한 노꼬메 오름은 난도에 따라 A, B, C, D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A 코스가 가장 완만하고, C코스가 난도 최상이다. 많은 오름을 다녀봤지만 노꼬메 오름의 C코스만큼의 가파른 경사가 있는 곳도 찾아보기 힘들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묵묵하게 걸어가다 보면 머지않아 정상이 보인다. 그렇게 정상에 올라 시원한 보리차를 마시면서 제주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역시 오르길 잘했어.'라고 혼자 흐뭇해한다.


  늘 자신감이 없고 불안했던 지난날들을 버티게 해 줄 수 있었던 건,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노꼬메의 역할이 컸다. 새벽 여섯 시쯤에 나서게 되면 운이 좋을 경우 정상에 나 혼자만 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모든 자연들이 다 내 것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상 속에서 느껴보지 못할 해방감. 눈감고 바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생각의 찌꺼기들이 같이 씻겨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모든 걸 털어놓고 가볍게 하산을 하고 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오랜만에 제주에 가자마자 노꼬메 오름으로 향했다. 몇 년 사이 나는 참 많이 변했지만 그곳은 그대로였다. 30분 정도 정상에 혼자 전세 놓은 듯 노래도 불러보고 명상도 해보면서 신나게 즐겼다. 늘 그랬듯이 가방 속에 보리차가 담긴 텀블러 한 개와 걱정 고민들을 욱여놓고 가서 빈 텀블러만 가지고 내려왔다. 그렇게 위로받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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