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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ha Oct 01. 2023

산 그리고 바다

 등산을 좋아한다. 등산의 과정이 삶과 참 많이 닮아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과정이 결코 녹록지 않지만, 그저 묵묵히 걸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다다르게 된다. 시원한 보리차 한 잔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푸릇푸릇한 절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며 스스로를 위안했던 시절들이 있었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등산을 했다. 지하철에서부터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을 마주한 순간부터 살짝 불안했다. 친한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입이 닳도록 등산을 영업하던 내가 등산로에 들어서는 길에서부터 망설여진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의아했다. 발걸음도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게 왠지 그날은 컨디션이 영 아닌 것 같았다.


 입구에서 등산로를 따라 걸어가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 하나하나가 귀에 박혔다. 조용하게 사색을 즐기며 등산하고 싶은데 옆 사람의 소개팅썰과 직장 상사 욕을 들어야 한다니. 일단 거기서부터 불만이 시작됐다. 그리고 정상으로 가는 이정표가 모호하게 있어 자꾸만 길을 헤맸다. 중간에 한참을 잘못 들어가고 나서야 길을 잃었음을 직감하고 다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래도 정상에 갔을 때의 성취감 하나만 믿고 다시 열심히 걸었다. 하지만 겨우 정상에 다다랐을 때 이상하게도 예전만큼의 감흥이 없었다. 이렇게 고생 고생 해서 올라왔는데도 정상은 내 기대와 달리 오히려 삭막하기만 했고 찝찝한 기분만 남긴 채 내려왔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 고향에 내려가는 비행기에서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우리의 인생은 어쩌면 산보다 바다를 닮았을 수도 있단 내용이었다. 산을 타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수는 있지만 바다는 오히려 억지로 막거나 바꾸려 하지 않는다. 각자 때에 맞게 나름의 속도로 알맞게 밀려온다는 건데, 내가 최근에 느꼈던 삶의 태도가 산에서 바다로 바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거친 파도와 잔잔한 물결의 일상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헤엄쳐나가기도 하고, 그냥 둥둥 떠밀려다니기도 했던 순간 순간들. 그리고 실패와 좌절을 굳이 이겨내려 하기보다는 그냥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오히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최근 삶을 마주하는 나의 생각들이 오히려 바다 같은 삶이었음을 알아챘다.


 그래도 여전히 등산을 사랑한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감정들 하나하나가 여전히 내 세포를 자극하고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릎이 따라주지 않음에도 오기로 무리하게 등산을 하려고 덤벼들진 않을 것 같다. 이젠 확실치 않은 무언가에 아등바등 매달릴 만큼 나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작은 오름하나 오르면서도 소소하게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등산을 더 자주 하고 싶다.


 등산의 계절 가을이다. 아웃렛 가서 등산복이나 잔뜩 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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