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그러니까 무려 40년 전이네요. 부모님께서 오빠랑 제 이름을 유명한 작명소에서 다시 지어오셨어요. 새로 지은 이름은 예쁘고 개성 있고 스무 살 저랑도 잘 어울려서 좋았어요. 그런데도 왠지 선뜻 이름을 바꾸고 싶지 않았어요. 그동안의 내가 사라지는 것만 같아 쉽사리 개명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았네요. 가족들과 친구들, 지인 모두 나를 바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보니 본명은 서류상으로만 남은 이름이 되어 버렸어요. 육신을 보내고 이름만 남게 되는 저의 훗날을 떠올려 볼 때, 제 정체성도 모호하고 남은 이들에게도 나를 나로 추모하기가 혼란스러울 거 같아서 뒤늦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개명 허가판결은 3개월 정도가 소요된대요. 나이 예순 되는 그날부터 온전하게 새 이름으로 살게 될 제 인생 후반이 많이 기대됩니다.
또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오늘 밤 슈퍼문을 볼 수 있다는데, 모두 큰 소원 하나씩 빌어봐요~^^
24. 10. 15 tue
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좋아 우산을 들고 명상터에 나왔다. 걷기에 딱 좋을 만큼의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요즘 한강 작품 낭독을 듣고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뜨거운 가슴으로 썼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집필할 때의 정신 풍경에 대한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심장 속 아주 작은 불꽃이 타고 있는 곳,
전류와 비슷한 생명의 감각이 솟아나는 곳'
그곳에서 그녀의 글이 나온다.
담기에 너무 버겁다. 그래서 못 읽는 독자도 많다. 많이 불편하다. 그녀는 트라우마에 정면으로 맞서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보일 수 없는 부분까지 다 드러내묘사했다. 그동안 그녀가 끌어안았을 정신적 고통이 보인다.
한강은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피한다고 없는 것이 되는 게 아니니까. 그들의 억울한 희생을 기억해 주어야 하니까...
가을나무에서 벚꽃을 피우듯 희망은 기적을 낳기도 한다. 이 세상에 이러한 아픔이 더 이상 없는 날을 꿈꾼다.
24. 10. 13 tue
아들이 하루 외박을 나왔습니다. 아들의 참새 방앗간, 쿠우쿠우에서 초밥을 배불리 먹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중간지점인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했대서 아빠랑 드라이브 겸 수원까지 데려다주었어요.
수원에 간 김에 수원 화성을 둘러보고 싶어 들렀는데 너무 넓어 다 둘러는 못 보고 서장대인 화성장대까지만 올라가 보았습니다. 수원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더군요. 정조가 직접 쓴 현판과 화성장대에서 감회를 담아 읊었다던 시도 눈에 담아왔습니다.
화성장대에서 친히 군사 훈련을 점검하고 지은 시를 문 위에 걸다.
현륭원 호위 중요하지만 세금과 노역 쓰지 않았네
성곽은 평지 따라 둘러 있고 먼 하늘 기댄 장대는 높다랐구나
많은 성가퀴 구조 굳건하고 군사들 의기 호기롭네
대풍가 한 곡조 연주함에 붉은 햇살이 갑옷을 비추는구나
24.10.11 fri
캠핑 잘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고 있어요. 간밤에 매우 기쁜 소식이 있었네요. 우리나라 한강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뿌듯한 소식에 기쁨이 배가된 여행길이 되었습니다.
몇 달 전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가슴에 구멍 뚫린 것 같은 슬픔을 느끼게 한 바로 그 한강 작가지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력한 시적 산문'이라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고 하던데, 한강 작가가 원래 시인이라 글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요. 한강의 대표소설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도 꼭 읽어 봐야겠어요. 정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입니다.
어제 불멍 하던 사진 올려요. 남편이 더 불멍에 빠져 새벽까지 장작을 태웠네요. 앞에서 누가 불꽃놀이도 해주는 바람에 더 좋았어요.
24. 10. 10 thu
맨날 캠핑유튜브만 보다가 드디어 로망을 이뤘습니다.
산데렐라 유튜버가 최근 소개한 태안 별쌍금 캠핑장에 왔어요. 10동밖에 안 되는 작은 캠핑장인데 전 동 모두 바다뷰가 으뜸입니다. 그 유튜버 하는 대로 태안 서부시장에서 어패류 사 와서 저녁엔 조개구이랑 삼겹살 해 먹을 거예요. 불멍도 함께 하려고 어제 로켓배송으로 화로대도 급조해서 챙겨 왔어요.
점심으로는 조개 넣고 칼국수 끓여 먹고, 커피 한 잔 하면서 텐트마저 세팅 중입니다.
우리 동네만 구름이 이쁜가 했더니 충남 오니 구름이 미쳤어요. 차에서 오는 내내 구름 구경만으로도 이 번 여행 아쉽지 않을 정도로 이쁘더라고요.
그럼 남편 텐트 피칭 도와야 해서 서둘러 인사드립니다. 잘 쉬다 돌아갈게요.
24. 6.10 mon
산책 전에 일기부터 쓴다.
작가 한강의 새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오늘 다 읽었다. 무거운 심경으로 어렵게 읽어 내려간 소설이었다. 80여 년 전, 아무 죄도 없는 제주 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절멸을 목적으로 무차별하게 학살하고, 수십 년간 쉬쉬하며 정부에 의해 숨겨온 제주 4.3 사건의 실체, 그 피해자와 유족의 아린 상처가 담긴 글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고통은, 학살의 대상에 영유아도 가리지 않았다는 거다.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는 억울하게 삶을 잃은 희생자와 유족들을 결코 잊고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표현한 거라 생각한다.
이렇듯 쾌청하게 맑은 하늘 때문에 오히려 더 슬프다. 지금 내 가슴은 어두운 동굴 속에 뒤엉켜 있는 수천구의 뼈들과 함께 갇힌 듯하다.
('히로인스'라는 운동앱에 올린 일기글을 추려서 5~7편씩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기에서 지칭하는 히팸은 히로인스 가족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