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 여인의 자화상(2001)
< 소녀의 城 >은 2001년에 대학 동아리 카페에 올렸던 글이다. 오랜 세월 서랍 속에 넣어둔 글을 꺼내어 읽노라니 오래된 책에서 느껴지는 곰팡내가 풍기는듯하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오늘에 이르고, 이 오늘도 또 세월 저편으로 흘러가게 되겠지..
그러나 흘러간 세월도 결코 사라지는 건 아니구나 하고 다시금 느낀다. 세월은 그렇게 흔적을 남긴다.
< 소녀의 城 >
소녀가 城을 짓기 시작한 건 소녀가 14살 때 그녀의 집 2층에 작은 방을 갖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녀의 방에는 장롱과 책상, 그리고 2인용 소파가 있었고 남쪽으로 난 제법 큰 창 앞에는 넓은 테라스가 있었습니다. 그 아래로 빛바랜 낮은 지붕들이 연이어 붙은 마을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그 낮은 지붕들을 한 참 벗어난 끝에는 소녀의 집처럼 초록색 지붕의 또 다른 예쁜 2층 집이 있었는데 소녀의 방 창에서 그 집은 작은 성처럼 느껴지게 했습니다. 소녀는 그 성을 향해 막연한 상상을 하곤 하는 버릇이 생겼었습니다. ‘저 집엔 누가 살까?’
언젠가 그 집에 가까이 가보았을 때 그 집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된 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등나무 줄기가 창문을 빼고 온 집을 덮고 있었으니까요. 그 후로 소녀의 가슴에 그 집은 더욱 신비롭게 다가왔습니다. 정말 작은 城 같다고 느꼈습니다.
어느 겨울, 소녀는 노란 튜울립 두 송이를 리본 장식을 한 유리잔에 꽂아 창가에 놓았습니다. 창가로 내어 들어오는 따뜻한 겨울 햇살이 그 튜울립을 더욱 특별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소녀는 그 모습이 너무 예뻐 일기장 한 곁에 스케치를 해보았었습니다. 소녀는 그때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생각했습니다. 어린 왕자가 너무나 사랑했던 장미꽃, 자신의 작은 별에서는 하나뿐이었던 그 도도한 장미꽃이 지구란 별에 와보니 똑같은 흔한 장미꽃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후에 만난 여우를 통해서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 소녀는 그때 그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가슴에 깊게 새기었었습니다.
소녀가 24살이 되던 해 소녀의 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물려준 새로운 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방은 2층에서 가장 넓은 방이었는데 책상과 장롱, 소파 외에도 언니가 쓰던 화장대와 피아노, 오디오까지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때부터 소녀의 집에서 자신의 방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방 문에는 소녀가 가장 좋아하는 고호의 그림도 붙여놓았었습니다. 흙 위에 핀 보라색 꽃 그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자란 등나무가 2층 테라스를 통해 지붕 위로까지 뻗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여름날 오후 그 그늘 아래서 레마르크의 개선문과, 브론테 자매의 소설들, 파우스트 등을 읽었었습니다. 또 까만 밤을 새우며 창가 책상에 앉아 긴 일기나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늦은 가을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날, 소녀의 어머니는 소녀의 창가에 서서 을씨년스럽게 나뒹구는 등나무 잎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저렇게 되는 거야..’ 소녀는 소파에 앉아서 씁쓸한 웃음을 지으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눈가가 등나무 가지에 매달려 파르르 떨고 있는 마른 낙엽처럼 느껴지자 소녀는 핑 도는 눈물을 감추며 쓴 침을 삼켰습니다. 철없던 소녀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의 존재를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엄마..’
이듬해 봄, 소녀는 결혼을 하게 되어 오랜 세월 정든 그 방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몇 날 며칠 창가의 책상에 앉아 등나무를 바라보며 자신의 방을 떠나는 아쉬움을 삼키었습니다.
소녀의 새 보금자리는 17평 작은 아파트였습니다. 5월에는 베란다 창으로 라일락 향기가 짖게 올라오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멀리 베란다 밖을 바라보면 공터의 푸른 잔디와 그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나무들이 보였습니다. 젖 빛으로 활짝 핀 벚꽃들은 너무나 황홀했지만 잠깐 피고 지는 아쉬움 때문에 소녀는 그보다는 잔디를 더 좋아했습니다. 소녀는 잔디의 그 녹색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늘 그 푸른 잔디가 보이는 곳에 앉아 음악도 듣고 책도 읽었습니다.
이사 오기 전, 소녀는 그녀의 남편과 함께 어두운 창틀과 문을 우유 빛 페인트로 공들여 칠했습니다. 침실 전체에는 핑크 빛 카펫을 깔았고, 침대의 머리맡에는 커다란 모네의 해바라기 그림을 걸었습니다. 모네의 그림은 거친 붓 터치가 고호의 그것과 닮아 소녀는 그 그림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침대 옆에는 은은한 램프와 포근해 보이는 작은 소파도 있었습니다. 작은 아파트였지만 소녀는 정성껏 집을 꾸몄습니다. 소녀는 그녀의 집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소녀는 조금도 답답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끔씩 이웃이 놀러 오기는 했어도 소녀는 이웃을 잘 찾지는 않았습니다. 소녀는 그녀의 집안에서만 행복해했으니까요. 그 집은 소녀의 새로운 城이었습니다. 소녀는 그곳에서 5년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2평 남짓한 작은 곳에서 시작한 소녀의 城은 이제 32평으로 넓어졌습니다. 그곳은 소녀에게는 천국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대보름 때 사람들은 빈 들녘 이곳저곳에서 불을 지피고 흥겨운 불꽃축제를 벌였습니다. 한국인들에게도 이런 여유가 있는 줄을 소녀는 처음 알았습니다. 겨울엔 꽁꽁 언 저수지며 개천이 모두 꼬마들의 썰매 장이 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할아버지가 마른 짚들을 모아 불을 놓고 고구마를 구웠습니다. 한참 썰매를 지치던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지펴놓은 모닥불에 모여들어 손과 입가에 검은 숯을 묻혀가며 구운 고구마를 불어 먹습니다. 소녀는 이제껏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본 적이 없었었습니다.
어느새 소녀의 머리에서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소녀의 나이는 어느새 서른일곱이나 되었으니까요. 언제 부터인가 여인이 된 것입니다.
여인은 네 번째로 맞는 그녀의 城을 정말로 좋아했습니다. 그녀의 성은 많은 것이 변하였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소녀시절 가지고 있었던 검은 피아노뿐이었습니다. 여인은 피아노를 놓을 방에 더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벽은 그녀가 좋아하는 푸른 녹색의 벽지를 바르고, 또 포근하다던 작은 소파와 글을 쓰기 위한 컴퓨터도 그 방에 놓았습니다. 책장엔 그녀가 즐겨 읽었던 고전 서들을 꽂았고 서랍 깊은 곳엔 긴 이야기가 적혀있는 다섯 권의 일기장도 놓여 있습니다. 또 연애할 때 밤새워 써서 보냈던 소녀의 편지들이 붉은 상자에 담긴 채로 여인에게 되돌아와 있고, 소녀시절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앨범도 그 방 책상 밑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인이 성 안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窓,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그 창이 방 한 벽을 차지하였습니다. 窓은 여인의 어느 城에서든 항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인은 창을 통해 이상을 꿈꾸었고, 창을 통해 인생을 배워갔습니다. 창 밖의 세상은 여인의 눈을 통해 여인의 의식을 움직였고, 여인의 철학이 그곳에서 생겨났습니다. 창은 그녀의 전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인은 항상 창 가까이에 있었으니까요.
여인은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듯싶었습니다. 여인은 늘 행복해했고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해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여인이 한 가지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성공된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지금, 성공된 삶은 진실한 사람을 많이 얻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이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누가 내 무덤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려줄까?’
여인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城안에서 너무나 이기적으로 살았다고 참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城밖을 떨쳐 나오기가 몹시 두렵습니다. 영원히 나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여인은 기도 합니다. 용기를 달라고…
<끝>
15년의 세월이 더 흘렀건만 여인에게 세상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이다. 영원히 城안에 안주하고프다..
*관련글 - 여인의 성(城)
https://brunch.co.kr/@seoheek/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