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 머무는 시간
선을 긋고 나면 항상 잠시 멈추게 된다.
더 그릴 수 있을 것 같아도 바로 이어서 움직이지는 않는다.
방금 지나간 선이 아직 화면 위에 생생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선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어디에서 속도를 늦추었는지
내 몸은 이미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다음 선을 긋지 않으려 한다.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움직이다 보면,
선은 자칫 성급한 설명이 되기 쉽다.
멈춤은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이 온전히 머물 수 있는 자리다.
음악에서 쉼표가 소리를 끊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남기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선은 그어진 직후보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는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도드라지거나 너무 조심스러워 보이던 선이,
화면 안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녹아든다.
그래서 나는 선을 그은 뒤 한 걸음 물러난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고, 당장 판단하지도 않는다.
지금 이 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보다,
무엇을 아직 말하지 않고 남겨두었는지를 가만히 살핀다.
흐름만 있으면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멈춤이 없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작업을 하며 나는 이 단순한 사실을 몇 번이고 확인한다.
멈춘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도, 그저 서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나간 것을 흘려보내지 않기 위한 능동적인 선택이다.
선이 멈춰 있는 동안 화면은 조용해진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방금까지의 움직임이 잔향처럼 감돈다.
나는 그 잔향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다음 결정을 기꺼이 미룬다.
오늘도 흐름과 멈춤 사이 어딘가에서 작업은 잠시 멈췄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여기까지'라는 감각만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 지점이 바로 오늘의 화면이고, 오늘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