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그린다는 것

by 서히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소리를 그린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음악을 배울 때 소리는 늘 시간 속에 있었다.
앞선 소리가 지나가고 다음 소리가 올 때까지
잠시 비어 있는 순간이 생겼다.
그 비어 있음까지 포함되어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졌다.


회화를 시작하면서 나는 그 흐름을
공간 위에 남기게 되었다.
소리를 그대로 옮기려는 것은 아니다.
음표를 그리거나 리듬을 흉내 내는 일도 아니다.
다만 어떤 순간, 들렸던 감각이
선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서 있으면
가끔 손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아직 말로 정리되지 않았는데,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그럴 때 나는 이 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굳이 묻지 않는다.
다만 이 선이 너무 빨리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직 남아 있어야 할 여백을 지워버리지는 않는지 조심스럽게 살핀다.


소리는 사라지는 순간에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귀에는 남지 않지만, 몸에는 잔향처럼 남는다.
어떤 소리는 하루가 지나서야
다른 감정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내가 그리는 선도 그와 비슷하다.
지금 그어진 선이
지금의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이 선이 지나간 자리에 무언가 머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선을 많이 긋기보다
선을 듣는 쪽에 가깝다.
이 선이 어떤 속도로 지나갔는지,
어디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지,
어디쯤에서 멈추고 싶어 하는지.

소리를 그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이미 지나간 감각이 다른 형태로
잠시 머무를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 가깝다.


오늘도 작업실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나는 분명히 어떤 리듬 안에 있었다.
그 리듬이 선으로 옮겨졌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소리를 흘려보내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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