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밝기

- 무엇이 보이기 시작하는가..

by 서히

감각에는 저마다의 밝기가 있다.
같은 장면을 보고 있어도
어떤 날은 유난히 많은 것이 보이고,
어떤 날은 무엇 하나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은 빛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눈앞의 세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가 받아들이는 밀도만 달라진 상태인 것이다.


어떤 날은 화면이 지나치게 어둡게 느껴지기도 한다.
선이 잘 보이지 않고, 색이 서로 섞이지 못한 채
제각각 따로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때 나는 무언가를 억지로 더하려 하기보다
잠시 멈추는 쪽을 택한다.

감각이 밝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것을 본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가
조금씩 읽히기 시작한다는 뜻에 가깝다.
선과 선 사이의 간격,
색과 색 사이의 온도,
면 위에 남아 있는
미세한 흔적들 같은 것들.


나는 작업을 하며 ‘잘 보인다’는 말 대신
‘조금 밝아졌다’는 표현을 더 자주 떠올린다.
무엇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거기 있던 것이 이제야 비로소
구분되기 시작했다는 감각에 가깝다.

감각이 밝아질수록 세계는 더 선명해지기보다
오히려 더 조용해진다.
불필요한 것들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지를 몸이 먼저 알아채기 때문이다.

그래서 밝은 감각은 들뜬 흥분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속도가 느려지고, 선택은 줄어들고,
하나의 시선이 오래 머문다.


오늘의 화면에서도 나는 특별한 변화를 만들지 않았다.
다만 예전보다 조금 덜 흔들렸고,
조금 더 오래 한 자리에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그 차이를 ‘밝아졌다’고 부르고 싶다.
더 많이 본 것이 아니라,
지금 마주한 것을 조금 더 정확하게 보고 있다는 감각.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작업은 이미 충분히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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