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은 과학자에서 프로게이머로, 잠시 대통령이었다가 이내 작곡가로 진화하였다. 그 이후로 몇 번의 변태를 더 거쳤지만, 대중음악 평론가를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국신고서 직업란에 시인이라 적었다. 변화무쌍했던 내 장래희망의 역사 속에서 시인은 한 번도 자리하지 않았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직업이 시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이야 물론 있지만, 정리하자면 살다보니. 이것저것 하며 살다보니 어쩌다가 그냥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원하지 않은 삶을 사는 건 아니지만, 지금보다도 더 잘 살고 싶다. 나도 성공하고 싶어. 라는 말에 누군가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말했다. 성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어디 있겠냐마는, 사실 내가 바라는 성공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비루할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 참고서의 그 시처럼, 시인처럼 쓰며 살고싶지만, 내 능력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노력은 의지의 도움없이 설 수 없다.
시인을 장래희망이라 부르지 않는다. 장래희망은 평론가에 멈춰있고, 시인은 이미 취한 이름이기도 하니까. 그저 매일 쓰는 삶을 살고싶다. 그저라고 말하기엔 다소 거창하지만, 매일 쓸만한 능력과 그를 위한 노력, 의지. 그를 위한 시간과, 그렇게 살 수 있는 환경. 소비생활을 마음껏 즐기지 못해도, 그래서 연말정산에 세금 폭탄을 맞는데도, 하루에 두 끼쯤 굶는데도, 그런 삶을 살고싶다. 그렇게 되고싶다. 이런 성공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비루할지라도, 그들의 것만큼 동떨어져있다. 그래서 바라고 바란다는 뜻이 되었다. 희망이 되었다.
희망은 곧 고문이 되었고, 고문은 괴로움이 되었다. 괴로움에 대처하는 최선은 망각이라 나는 복 받은 이가 되었다. 내 스승이 말한 이가 되었다.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이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