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별하지 않는 교사일까
얼마 전, 피아노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학창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범대 출신인 선생님은 교직에 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유독 싫었던 선생님 유형을 꼽았다. 바로 ‘차별하는 선생님’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과연 차별하지 않는 교사일까. 사회 교과서의 정의가 문득 떠올랐다.
- 편견이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며, 부정적인 편견은 그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차별로 이어지기 쉽다. (비상교육, 『사회1』, 137쪽)
교사가 학생을 차별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시절부터 수없이 들었고, 나 역시 학창 시절 공부 잘하는 아이, 예쁜 아이에게만 향하던 선생님의 ‘소소한 차별’을 기억한다. 그래서 늘 조심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는 어쩌면 가장 교묘하고도 위험한 형태의 차별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반 아이들’을 향한 차별 말이다. 수업 종이 울린 뒤 복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다. 다른 반 아이들이면 ‘그래, 학교는 저렇게 즐거워야지’ 하며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우리 반 학생인 순간, 내 마음속 잔잔하던 파도가 거칠게 일기 시작한다.
‘조종례 시간에 그렇게 얘기했는데, 왜 또 말을 안 듣는 거지?’
‘저러다 다른 선생님께 혼나면 어떡하지?’
‘혹시 규칙을 어기는 어른으로 성장하면 어떡하지?’
걱정은 이내 큰 스트레스로 바뀌고, 나는 결국 다른 반 아이들에게 보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더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고 만다.
가장 사랑하기에, 가장 엄격해지는 모순.
그것이 바로 내가 매일 교실에서 마주하는 차별의 얼굴이었다.
합창대회 연습 시간에도 그 모순은 드러났다. 즐겁게 노래하던 아이들이 내 앞에서 연습한 것을 보여줄 때, 한 박자만 틀려도 움찔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며 주눅 들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아이들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엄격한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걸까. 내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봤다.
왜 유독 우리 반 아이들에게만 더 엄격해지는 걸까.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책임감’이었다. 내 반 아이들이니까, 내가 맡은 아이들이니까. 하지만 그 책임감의 밑바닥에는 비겁한 마음이 숨어 있었다. 아이들이 잘해야 내가 ‘괜찮은 교사’로 인정받을 것 같았다. 우리 반의 모습이 곧 나의 얼굴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의 자유로운 가능성을 ‘내 평판’이라는 틀 안에 가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는 사회 교과서가 다루는 ‘장애인이나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오히려 ‘내 새끼는 잘해야 한다’는 긍정적 편견, 즉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역설적인 차별에 가까웠다.
이런 생각의 꼬리를 따라가다 보니, 문득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질문이 생겼다. 몇 년 전, 인터넷에서 길가에 버려진 새끼 고양이를 발견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은 또 다른 사람이 곧장 그 아이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데려가, 주머니를 털어 병원비를 내며 밤새워 간호했다. 그 따뜻한 이야기 앞에서 나도 마음이 움직였지만, 동시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정말 순수한 걸까, 아니면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를 메우기 위해서일까?’
생명을 대할 때조차 우리는 감정의 편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귀엽고, 마음이 쓰이는 존재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에는 무심해지기도 한다. 결국 인간의 사랑은 ‘모든 생명’이 아니라 ‘내 마음이 닿는 생명’을 향해 흐른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사랑은 이상화된 감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하는 선택이 된다.
그제야 내 교실을 다시 떠올렸다. 혹시 내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대상’. 즉 내 반 아이들에게만 과도한 감정과 기대를 쏟아왔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사랑이 지나쳐 아이들을 내 기준안에 가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만약 저 아이가 다른 반 학생이었다면, 지금에 이 상황을 어떻게 봤을까?’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마음의 결이 달라졌다. 화가 날 일도 조금은 연민으로, 실망스러운 장면도 조금은 다정한 시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솔직히 말한 적도 있다.
“내가 너희에게 더 엄격할 때가 있어. 그건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커서 그래. 하지만 가끔은 그 마음이 엇나가기도 해.”
그 고백을 들은 아이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오히려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선생님도 사람이구나’라는 안도감과 ‘우리는 함께 성장하고 있구나’라는 기묘한 평화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편견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선택해 더 마음을 쏟는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감히 누가 누구의 차별을 온전히 비난할 수 있을까. 고양이를 살리며 마음이 따뜻해진 그 사람처럼, 나도 아이를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다가가지만, 혹시 그게 나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심은 아닐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 안의 편견과 차별을 끊임없이 인지하고 질문하는 것뿐이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내집단(in-group), 즉 가족, 친구,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행하는 역설적인 차별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을 내 얼굴로 삼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그들 각자의 얼굴을 온전히 바라봐야 한다. 오늘도 질문한다. 내가 아이들을 대할 때 진심으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 당신은, 가장 사랑한다는 이유로 누구의 얼굴을 가장 엄격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서로의 진짜 얼굴을 얼마나 놓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