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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늘이 예뻐서 죄책감이 들었다.

창밖을 보는 아이와 수업하는 교사의 헌법적 딜레마

by 서이안

오늘, 하늘이 너무 예뻐서 죄책감이 들었다.

11월의 오후, 창밖에는 햇살과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이 떠 있다. 순간 30명의 아이들을 좁은 교실에 붙잡아두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교사로서의 의무와 한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동시에 손을 잡고 나를 끌어당겼다.

11월의 교실 창밖 풍경. 아이들을 붙잡아두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었던 아름다운 그날입니다.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비상교육, 『사회 1』, 206쪽)


교과서 206쪽에 밑줄을 그으라고 하고,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여러분의 행복추구권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어요.”

강의용 문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 안의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수업 중 5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행위도 ‘행복추구권’의 범주에 들어갈까.

창가 셋째 줄, 한 아이의 시선은 칠판이 아닌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 수업을 열심히 듣던 녀석이다. 아이의 눈동자에 뭉게구름이 담겨 있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교사로서 생각했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네...’

교사로서 교실 앞에 서면, 아이들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도 다 눈에 들어온다. 특히나 신규교사일 때는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를 보면 모두 내 수업 준비가 모자란 탓인 것 같아서 자존감이 낮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기억 속의 어린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학창 시절 나도 몰래 창밖을 훔쳐보며 다른 세계를 꿈꿨다. 그때 내가 원한 것은 꾸중이 아니라, 다정한 방관이었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은, 사실 영국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이 말한 자유의 두 가지 개념과도 연관이 있다. 이사야 벌린은 역사적으로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두 가지 개념이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창밖을 멍하니 보는 아이가 원하는 것은 '소극적 자유(타인에게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을 자유)'에 가깝다. "저 좀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는, 누구에게나 공감받기 쉬운 직관적인 권리인 것이다.

반면, 교사인 내가 아이를 깨워 수업에 참여시키려는 행위는 '적극적 자유(삶을 주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를 위한 것이다. 아이가 배움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을 갖추도록 돕는 것이다. 문제는, 아이의 적극적 자유를 보장하려는 교사의 선한 개입이, 아이의 소극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이 딜레마는 창밖을 보는 아이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유로운 행복추구는 교실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큰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이, 매 교시 수업 시작 5분 후 화장실을 가는 아이, 옆 짝꿍을 쿡쿡 찌르며 장난을 멈추지 않는 아이.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딴짓을 할 때 보이는 그 행복한 표정을 보면, 교사로서의 의무를 다시 망설이게 된다. 창밖을 보는 고요한 멈춤과, 노래를 부르는 소란스러운 표출은 같은 행복추구권으로 존중받을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나는 교실이 개인의 사유 공간이 아님을 깨닫는다. 사회 교과서는 기본권의 제한을 말한다.


헌법 제31조 ①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37조 ②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


헌법 제31조가 보장하는 교육받을 권리, 그리고 헌법 제37조 2항이 인정하는 공공복리를 위한 기본권의 제한은 법적으로 보장받는 수업에서 현실적 힘을 가진다. 한 아이의 소란스러운 자유가 다른 친구들의 학습권을 부당히 침해할 때, 교사는 단순한 윤리적 선택을 넘는 헌법적 판단의 순간에 서게 된다.


이쯤 되면 나의 판단이 어땠을지가 궁금할 듯하다.


결론적으로 그날, 나는 그 창밖을 보던 아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연민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회 교사로서, 작은 교실이라는 공공영역의 대표자로서 판단했다. 그 5분의 고요한 멈춤은,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는 행위와는 달리,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을 근본적으로 침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아이가 스스로를 재정비해 다시 수업에 복귀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말하자면 나는 다정한 방관이라는 감정적 선택을 넘어, 교실의 공공복리와 개인의 행복추구권 사이를 저울질한 헌법적 판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모든 멈춤을 무조건 허용할 수는 없다. 노래를 부르거나 장난을 치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수업 흐름을 방해하거나 타인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행동에는 분명한 제재가 필요하다. 하지만 판단의 첫 반응이 자동적으로 통제가 아니라 이해와 검토라면, 더 섬세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이 작은 교실은, 우리 사회 전체가 매일 마주하는 딜레마의 축소판이다.

창밖을 볼 권리를 어디까지 허용하고, 수업 분위기를 위해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오늘 내가 한 아이의 행복 추구권과 나머지 스물아홉 명의 수학권 사이에서 고민했듯, 우리 사회 역시 매일 대립하는 가치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교실은 어쩌면, ‘어떤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그 거대한 질문을 매일 연습하는, 가장 작지만 가장 중요한 무대일지도 모른다.


교실은 지식만 전하는 곳이 아니다. 때로는 숨을 고르는 법을 가르치는 작은 사회이다. 그 5분의 창밖 보기는, 누군가에게는 사치이고, 누군가에게는 생존 장치다.

나는 그날의 기다림을, 개인적 연민이 아니라 하나의 헌법적 판단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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