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의 질문 지옥에서 관계의 신호를 발견하기까지
“세상에 쓸모없는 질문은 없다. 불친절한 답변만 있을 뿐이다.”
한때 지적 호기심을 응원하는 근사한 격언처럼 들렸던 말이다. 나도 이 말을 굳게 믿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중학교 교실, 그 '질문 지옥'의 한복판에 직접 서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수업 종이 울린다. 아이들은 여전히 복도에서 떠들고 있다. "얘들아, 교실 들어가자." 간절한 부탁에 몇몇이 마지못해 들어간다. 교실 안은 이미 서서 노는 아이들로 어수선하다. "자, 자리에 앉자. 교과서 펴볼까?" 칠판 왼쪽에 큼지막하게 쓴다. 'p. 130'. 그리고 다시 말한다. "130쪽 펴세요."
그때부터 질문이 쏟아진다. "샘, 오늘 몇 쪽이라고요?" "샘, 130쪽 맞아요?"
"네, 130쪽이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아이들을 쭉 훑어보면 꼭 한두 명은 엉뚱한 페이지를 펴놓고 있다. 직접 130쪽을 펴주고 수업을 시작한다. 5분쯤 지났을까, 딴짓하던 녀석이 손을 든다.
“샘, 근데 지금 어디 하는 거예요? 몇 쪽이에요?”
“... 130쪽.”
시험 기간의 풍경은 이 현실을 더욱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몇 주 전부터 답안지는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마킹하도록 안내하고 몇 차례 연습도 진행한다. 시험 당일 날 아침에도 주의사항을 공지한다.
“답안지는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체크하고, 문제는 20번까지 있으니 인쇄 상태 먼저 확인하세요.”
시험 시작 후, 질문이 쏟아진다.
“선생님 이거 볼펜 써도 되나요?”
“선생님 저 20번까지밖에 없는데 맞나요?”
이것이 내가 매일 마주하는 교실의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럴 때면 '쓸모없는 질문도 분명히 있다'는 깊은 회의감을 지울 수 없다.
이 딜레마에 대해, 예전 평소 존경하던 어느 글쓰기 전문가에게 "방금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되묻는 학생들은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요?"라고 여쭤본 적이 있다. 전문가의 답은 간결했다. "미처 생각 못 했네요. 적당히 무시해야죠. 그러면 잘 들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 말이 옳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보통 30명의 학생 중 28명은 이미 내 말을 듣고 묵묵히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 한두 명의 반복되는 질문에 일일이 반응해 주는 것이, 어쩌면 나머지 28명의 집중력을 갉아먹는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질문을 나의 '불친절한 설명 탓'으로 돌린다면, 교사의 자존감은 버텨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그 질문들을 무시해 본 적이 없다. 적당한 무시가 설령 답일지라도, 그로 인해 상처받을 아이와 불편해하실 학부모님의 민원이 먼저 떠오르는, 나는 그저 평범한 교사일 뿐이다.
물론, 나 역시 '질 높은 질문'이 주는 희열을 알고 있다. 얼마 전, 민주주의의 이념인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을 가르쳤다. 교과서에 나오는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의 차이를 설명하던 참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한 아이가 교무실까지 쫓아왔다.
"선생님, 아까 말씀하신 실질적 평등이랑, 제가 초등학교 때 배운 공정이라는 개념이랑은 뭐가 다른 거예요?"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교과서의 개념과 자신이 이미 알던 공정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연결해 낸 것이다. 나는 덩달아 신이 났다.
"정말 좋은 질문이야!"
그 질문은 내가 대학생 때, 그리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치열하게 파고들었던 주제였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서 말한 ‘분배적 정의’부터 마이클 샌델의 정의 이야기까지,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아이와 한참을 떠들었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돌아갔다.
이것이 질 높은 질문이 가진 힘이다. 가르치는 나와 배우는 아이 모두를 성장시키고, 지식의 연결을 폭발시키는 힘인 것이다.
운동을 할 때도 ‘좋은 자세’를 배우고, 음식을 먹을 때도 ‘좋은 음식’을 따지는데, 왜 유독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좋다 나쁘다를 가르치지 않으려 하는가? 오히려 ‘질 낮은 질문’과 ‘질 높은 질문’이 있음을 인정하고, 더 좋은 질문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 교사의 진짜 역할이 아닐까.
이 고민은 질 높은 질문의 희열을 알기에, 몇 쪽이냐고 반복해 묻는 아이들을 마주할 때 더욱 깊어졌다. 그 아이들의 질문을 그저 쓸모없는 질문으로 치부하고 무시해야만 하는 걸까.
교과서가 모든 사회 현상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이럴 때 나는 교과서 밖의 렌즈를 빌려오곤 한다. 사회학자 로버트 K. 머튼은 모든 사회 현상에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말했다. 겉으로 의도된 '명시적 기능(Manifest Function)'과, 숨겨진 '잠재적 기능(Latent Function)'이다.
아이들의 쓸모없어 보이는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몇 쪽이에요?"라는 질문의 명시적 기능은 페이지를 아는 것이다. 이 기능만 보면 이 질문은 칠판을 보지 않은 불성실한 질문, 즉 질 낮은 질문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잠재적 기능은 무수히 많다.
선생님, 저 여기 있어요. 저 좀 봐주세요. (관심의 요구)
방금 복도에서 뛰다 걸려서 주눅 들었어요.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안심의 요구)
수업 듣기 싫어요. 1분만 더 시간을 끌어주세요. (작은 반항)
선생님이 이래도 화를 안 내는지 궁금해요. (한계의 실험)
아이가 던진 것은 표면적으로는 '정보를 묻는 질문'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어쩌면 '정보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복잡한 신호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쓸모없는 질문은 없다”는 격언은, 어쩌면 “쓸모없는 신호는 없다” 는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교무실로 찾아온 아이는 ‘지식의 연결’이라는 신호를 보냈고, 반복해서 몇 페이지냐고 묻는 아이는 '나를 봐주세요'라는 관심의 신호, 혹은 어디까지 괜찮은지 시험해 보는 한계의 신호, 즉 '관계의 조율'이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둘 다 교사인 내가 응답해야 할, 절박하고 쓸모 있는 신호다.
물론,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질 높은 질문의 즐거움을 알려줄 의무가 있다. 그것은 교육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아이가 보낸 작은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응답해 주는 것, 그것은 관계의 영역이다. 열 번을 물어도 열 번을 웃으며 대답해 주는 나의 다정한 연기는, 어쩌면 ‘나는 너의 어떤 신호도 무시하지 않아’라는 가장 강력한 교육일지 모른다.
오늘도 그 ‘쓸모없는’ 질문에 웃으며 답한다. 칠판의 숫자를 알려주는 이 1초의 다정함이, 훗날 이 아이가 타인의 말속에 숨은 신호를 읽어낼 줄 아는 어른이 되게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쓸모 있는' 기대를 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