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위의 나, 글 속의 나, 그리고 아이들 속의 또 다른 얼굴
3교시 수업 종이 울렸지만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현우(가명) 2교시 때, 선생님한테 반항하다 상담실 갔어요.” 한 아이의 말에 교실이 금세 웅성거렸다. “걔, 처음 전학 왔을 땐 아닌데, 요즘 왜 그래?” 누군가 핏대를 세워 흉을 봤고, 그중 가장 목소리가 컸던 연찬(가명)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남았다.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뒤 문이 열리자 나는 얼어붙었다. 방금 전 그 신랄한 비난의 중심에 있던 연찬(가명)이가, 1초도 안 되어 현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힘들었지?”
순간의 표정 전환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교실이라는 무대에서 아이들은 관객을 의식하며 연기하는 법을 이미 익혔구나.'
현우가 걱정돼서 아이를 불러 상담했다. 전 시간에 평소 친했던 A 선생님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말꼬리를 잡다가 상담실에서 지도받았고, 죄송하다고 사과드리며 눈물도 흘렸다고 했다. 반성하는 모습이 대견해 위로하며 간식을 챙겨줬다. 그런데 며칠 후 수업 시간, 5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현우는 일부러 크게 소리 내어 자신을 혼낸 A 선생님과 또 다른 선생님들을 욕했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위로했던 아이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믿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은 종종 능숙한 배우가 된다. 친구와 교사라는 서로 다른 관객 앞에서, 순식간에 역할을 바꾸는 연습을 한다. ‘세상은 하나의 큰 무대고, 우리는 그 위에서 연기하는 연기자이다’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이 슬쩍 떠오른다.
그 생각은 설문조사에서 더욱 단단해졌다. 매 학기마다, 반 아이들에게 ‘솔직 고백’ 형식의 설문을 요청한다. "반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적어주세요. 선생님이 몰랐던 일도 좋고요."
우리 반 아이들을 잘 지도하고자 시작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솔직하게 적는 아이가 의외로 많았다. 더 놀라운 것은 서로 친해 보이는 아이들이 설문지에는 서로를 냉정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늘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가, 설문지에 ‘그 친구 사실 인성이 별로다. 내년에는 같은 반 되기 싫다.’라는 식으로 적어두는 장면을 보면서, 그들이 ‘좋은 친구인 척’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탓하고 싶은 건 아니다. 어쩌면 그건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 소속감을 얻기 위해, 비난을 피하기 위해, 혹은 단지 인정받기 위해 배우는 기술일 수 있다. 문제는 그 연기가 빚어내는 관계의 공허함이었다. ‘좋은 친구인 척’하는 연기가 서로의 생존을 도울지는 몰라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에게는 깊은 허무함을 안겨주었다.
그때, 거울을 보듯 내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진짜일까?'라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는 글을 쓰며 다정함이라는 내 지향을 더 분명히 하고, 그 글이 내 삶의 방향을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큰 불안이 시작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내게 말하곤 한다.
“선생님 되더니 목소리가 더 차분해졌네.”
그럴 땐 내가 정말 교사라는 역할에 익숙해졌구나 싶어 묘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브런치에 달린 "좋은 선생님 같아요"라는 댓글을 볼 때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감사하지만 덜컥, 겁이 난다. 그 칭찬이 내가 지향하는 바로 그 다정함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일까? 아니면 글이 만든 이미지에 나를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응원과 칭찬이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순간, 교실이라는 앞무대(Front Stage)에서 연기하는 내 모습과, 가면을 벗은 무대 뒤(back stage)의 나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발목을 잡았다.
이런 자각은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말한 '연기하는 자아'를 떠올리게 한다. 어빙 고프만은 우리의 일상적 삶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자아를 연출하는 공연과 같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는 종종 자발적으로 페르소나를 선택하고, 때로는 환경이 그 페르소나를 요구한다. 교사는 그 요구가 특히 강한 직업이다. 교실에서, 복도에서, 학부모 상담에서, SNS에서 무대 뒤를 가질 여지가 적다. 그래서 나의 가면은 더 자주, 더 오래 유지된다.
그렇다고 다정함을 거짓말이라고 매도하고 싶진 않다. 피그말리온 효과(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이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효과)가 시사하듯, 의식적인 기대는 현실을 바꿔낼 수 있다. 내가 꾸준히 다정함을 택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스스로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연기가 반복되면 때로 진심이 되고, 진심이 반복되면 그것은 습관이 된다. 그 점을 믿기로 했다. 의도적으로 다정함을 선택하는 행위는, 어쩌면 가장 솔직한 방식의 교육일 수 있다.
그러나 선택적 연기도 소진을 낳는다. 감정노동이라는 말은 교사의 일상에 이미 들어와 있다. 중요한 건 그 연기가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것을 지속할 에너지를 어떻게 관리하느냐다. 나의 경우는 메모 앱을 활용해 내 감정을 자주 기록하고, 휴식의 시간을 계획하며, 믿음직한 동료와의 대화를 통해 나를 지킨다.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작은 기대를 보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교실은 여전히 무대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편해진다. 그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맡을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다정한 교사’라는 페르소나를 택한다. 그 선택이 완전히 진짜인지, 완전히 연기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언젠가, 비록 연기로 시작된 마음이라도, 언젠가 한 아이의 진심과 맞닿는다면 그 순간만으로도 이 일을 계속할 이유는 충분하다.
어쩌면 나의 다정한 연기는 거짓이 아니라, 의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진심이란 완벽한 고정체가 아니다. 때로는 연기처럼 시작되지만, 그 반복 속에서 진짜가 된다.
아이들의 이중성에 실망하고, 내 안의 모순에 허무함을 느끼더라도, 나는 내일 또다시 ‘다정한 교사’의 페르소나를 쓸 것이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세상과 아이들에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된 진심이기 때문이다.
교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누군가는 나의 연기를 보고 배울 것이다. 언젠가 그 연기가 한 아이의 진심과 닿을 날을 믿으며, 오늘도 나는 커튼콜 없는 연극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