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속 아노미
3학년 교실, 준현(가명)이는 자습시간이면 귀마개를 꼽고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에도 식지 않는 열정으로 질문을 쏟아내던 녀석이, 어느 날 조용히 교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내신 점수 산출이 끝난 시점이었다.
준현이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생님, 학교에서는 공부가 잘 안 돼서요. 교외체험학습 쓰고 집에서 고등학교 선행학습을 시작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중학교라는 거대한 산을 막 넘어선 아이가, 정상에서 숨을 고르기도 전에 다음 산을 향해 등산화 끈을 조여 매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은 고등학교 입시로, 고등학교 입학은 수능으로, 대학 입학은 취업으로. 아이들의 목표는 톱니바퀴처럼 쉴 틈 없이,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이 쉼 없는 경주는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른이 된 우리도 여전히 비슷한 속도로 달리고, 비슷한 방식으로 불안을 소비한다. 가만히 있는 시간은 사치처럼 느껴지고, 쉬면서도 심장이 쿵쿵 뛴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아서, 누워 있어도 쉴 수가 없다.
나도 그랬다. 주변에서 누군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나만 정체된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동창이 주식이나 투자로 큰돈을 벌었다는 무용담을 들으면, 성실하게 교단에 서 있는 내 삶이, 왠지 미련하고 고지식해 보였다. 속된 말로 벼락거지가 된 기분마저 들었다. 소위 말하는 '포모 증후군(Fear Of Missing Out,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공포)'이었다.
그 공포는 일상으로도 파고들었다.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다가 안 읽은 책이 보이면 초조했다. 누군가가 "그 책 몰라?"라고 물을까 봐, 대화에서 소외될까 봐 불안했다. 돌이켜보면 내 학창 시절도 숫자에 지배당한 시간이었다. 기말고사 100점이라는 숫자를 간절히 원했고, 그 숫자를 성취했을 때 부모님이 보여주신 기쁨의 표정이 좋았다. 다이어트를 할 때는 체중계 위 숫자가 줄어드는 것에 기뻐했다. 100점이든, 10kg이든, 그 명확한 목표는 나의 규범이자 기준이었다.
대학 시절, 임용고시 합격이라는 마지막 목표를 향해 달렸고, 졸업과 동시에 교사가 되었다. 나를 지배했던 시험이라는 괴물에게서 드디어 벗어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공허했다.
그러다 이 기분이 낯설지 않음을 깨달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면, 그렇게 읽고 싶던 책들에 갑자기 흥미가 떨어져 그냥 누워 쉬고 싶었던 그 무기력함.
목표 체중을 달성하고 나서도 기쁨 뒤에 밀려오던 알 수 없는 허탈함.
지금의 공허함은 지난날 목표가 사라진 뒤 어김없이 찾아오던 그 권태와 꼭 닮아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공허함의 정체를 몰랐다. 그저 내가 변덕스럽거나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사회 교과서에 밑줄을 그으며, 비로소 그 감정의 이름을 찾았다.
아노미(Anomie) - 삶을 붙잡아주던 울타리가 사라진 상태.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가 제공하는 명확한 규범과 목표가 있을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낀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사회가 정해준 울타리가 있을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내게는 100점, 합격, 목표 체중 같은 숫자들이 삶을 지탱하던 가장 강력한 울타리이자 규범이었다.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나를 이끌던 규범이 갑자기 사라진다. 어제까지 달리던 트랙이 지워진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도착의 오류(Arrival Fallacy)'라고도 부른다. "그 목표만 달성하면 영원히 행복할 거야"라고 믿었지만, 막상 목적지에 다다르면 기대만큼 행복이 지속되지 않아 찾아오는 허무함이다. 목표가 사라진 나는 규범의 공백 상태에 빠졌고, 그래서 방황하고 공허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방황을 끝낼 방법은 무엇일까? 뒤르켐은 아노미의 해법으로 도덕적 규율의 회복과 사회적 연대를 제시했다. 욕망을 조절해 줄 새로운 울타리를 세우고, 공동체 안에서 다시 연결되어야 안정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규율은 무엇일까? 또다시 다음 시험과 선행 학습 같은 목표를 세워 아이들을 몰아붙이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끝없는 욕망과 불안의 질주를 멈추도록 쉼을 허락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교실에 가장 필요한 규율임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나를 다른 교사로 만들었다.
시험 마지막 날, 환호성과 함께 시험지가 공중을 날아다니고, 다음 날이면 교실의 절반이 엎드려 자는 ‘급성 아노미'의 풍경이 펼쳐진다. 예전의 나라면 "이제 시험 끝났으니 책 읽자", "중요한 사회 개념 복습하자", "사회랑 관련된 영화 보자"라며 어떻게든 그 공백을 새로운 목표로 채우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 방황과 무기력이 얼마나 필연적인지. 진정한 규율의 회복은 쉼 없이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설 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 책을 펴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하곤 한다.
"피곤한 사람은 엎드려 자. 무기력하면 그냥 창밖 보면서 멍 때려도 돼."
교실 앞에 서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린다. 안타깝고, 귀엽고, 불쌍하고, 또 어딘가 뭉클하다. 그 눈빛 속에서 예전의 나를 본다. 숫자에 매달려 쉼 없이 달리던 나의 과거를 말이다.
물론, 이 쉼의 허용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노력을 들이지도 않고, 최선을 다하지도 않은 채 쉼만 추구하려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는 다정한 방관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목표와 엄격한 조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눈앞에서 시험이라는 거대한 관문을 통과해 온 아이들, 준현이처럼 불안과 압박을 온몸으로 견뎌낸 아이들이라면 그들의 '아노미'는 병이 아니다. 그건 다음 단계를 위한 정신적 휴한기이자, 새로운 울타리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숨 고르기다. 교사의 역할은 그 텅 빈 시간을 불안해하며 새로운 규범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그 쓸모없어 보이는 방황을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지켜봐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뒤처지는 것 같다'는 불안에서 자유로워지려 노력한다. 지나온 내 시간의 농도가 결코 옅지 않음을 스스로 믿어보려 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텅 빈 눈동자를 볼 때면, 그 안에서 그들만의 치열한 시간을 본다. 시험지 위에 남긴 계산 흔적, 지운 답, 고민의 시간, 버티고 또 버틴 흔적들.
오늘도 졸업을 앞둔 아이들에게 투박하게 말한다.
"피곤하면 자, 멍 때려도 돼."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이런 마음을 담는다. 지금은 쉬어도 괜찮다고, 빈 시간이라고 해서 빈 삶은 아니라고.
그 비워진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 것, 그 공백을 불안해하지 않고 잠시 머물게 하는 것. 바로 그 태도가 아이들의 삶의 농도를 존중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교육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깊은 숨 고르기가, 훗날 아이들을 더 먼 곳으로 데려다 줄 단단한 호흡이 되어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