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3일 전, 버스에 오른 아이들에게 배운 것
중학교 3학년 2학기 말, 교실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다. 고등학교 입시를 결정짓는 ‘내신 성적 산출’이 코앞으로 다가온, 일분일초가 아쉬운 시기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문제집을 붙들고 씨름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그런데 이 살얼음판 같은 교실에 텅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선생님, 애들 지금 울산 갔어요. 전국 대회 뛰러요.”
우리 학교 여자 풋살부 아이들이었다. 시 대회를 휩쓸더니, 기어코 도 대회 우승으로 전국 대회 출전 티켓까지 거머쥔 것이다. 하필이면 그 대회가 기말고사 직전 주말이었다. 충남 아산에서 울산까지는 버스로 왕복 7시간이 넘게 걸린다. 게다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간 합숙하며 시합을 치러야 하는 일정이었다.
풋살부 아이들 중에는 평소 누구보다 치열하게 내신을 관리하던 녀석들도 많았다. 수행평가 1점에도 울고 웃으며 밤새 공부하던 아이들이, 시험 직전에 펜을 놓고 운동화 끈을 동여맨 것이다.
어른들의 셈법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이건 명백한 비합리적 선택이다. 전국 대회 우승이 고입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고, 왕복 7시간의 이동과 극심한 체력 소모는 당장의 시험 점수에 치명적인 손해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그걸 몰랐을 리 없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불안한 마음에 영어 단어장을 폈다 덮었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결국 복잡한 셈법은 잠시 접어두고 울산행을 택했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 월요일, 아이들은 잔뜩 풀이 죽은 채 학교로 돌아왔다.
“쌤... 토요일에 바로 떨어졌어요. 예선 탈락이에요.”
전국 대회의 벽은 높았다. 아이들을 인솔했던 체육 선생님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후배인데, 나중에 사석에서 듣기로 그날 밤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패배의 아쉬움이 뒤섞여 밤새 뒤척였다는 것이다. 우승 트로피는커녕, 진한 아쉬움과 묵직한 피로만 안고 돌아온 셈이다.
고개 숙인 아이들을 보며, 문득 나의 중학교 2학년 시절이 오버랩되었다.
나에게도 그 아이들만 한 시절이 있었다. 유난히 햇살이 좋았던 그해 여름방학, 산이나 계곡 대신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학원 강의실이 나의 피서지였다. 부모님이 힘들게 벌어 내주신 학원비가 떠올라, 어떻게든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학원을 몰래 빠지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거나 PC방으로 몰려갈 때도, 나는 우직하게 자리를 지켰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부러웠던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활발하지 못한 성격 탓에, 혹은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 탓에 나는 도서관이라는 안전한 성벽 뒤로 숨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나만의 조용한 낭만이자, 미래를 위한 치열한 투자였다.
물론 그 시간이 억울하거나 불행했던 건 아니다. 시간표를 꽉 채워 공부하고 나면 왠지 모를 뿌듯함과 안도감이 밀려오곤 했으니까. 그때 다져진 인내의 근육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 교과서에서 말하는 ‘기회비용’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기회비용이란, 어떤 선택을 하면서 우리가 함께 포기하게 되는 것들 중 가장 값이 큰 것을 뜻한다.
열다섯 살의 내가 ‘학원 공부’를 선택하며 지불한 기회비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친구들과 뒹굴며 보냈을 오늘의 즐거움이었다. 나는 안전한 미래를 샀고, 그 대가로 다시 오지 않을 ‘시절의 낭만’을 비용으로 지불했다.
반면, 풋살부 아이들은 정반대의 과감한 선택을 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라는 내일의 약속을 잠시 미뤄두고, ‘전국 대회’라는 오늘의 불꽃을 선택했다. 아이들의 기회비용은 2박 3일간의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대회를 준비하며 틈틈이 흘린 땀방울, 그리고 어쩌면 조금 더 높게 나왔을지 모를 시험 점수까지 모두 포함된 값비싼 비용이었다.
나의 중2 여름방학이 미래를 위한 안전한 적금이었다면, 아이들의 울산 원정은 현재를 불태운 눈부신 낭비였다. 나는 인내의 가치를 배웠고, 아이들은 도전의 기쁨을 배웠다. 두 선택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치열했고, 또 합리적이었다.
대회에서 졌으니 아이들의 선택은 실패한 투자일까? 눈에 보이는 수치로만 따지면 그럴지도 모른다. 비용은 썼는데, 눈에 보이는 수익인 트로피는 0이니까.
하지만 인생의 손익계산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나는 풀 죽어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얘들아, 너희는 진 게 아니야. 너희는 그라운드 위에서 돈이나 점수로는 환산할 수 없는 걸 얻었잖아.”
아이들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최선을 다해 달리는 법을 배웠다. 승리의 짜릿함과 패배의 쓰라림을 온몸으로 겪어냈고, 무엇보다 패배의 아쉬움을 삼킨 채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단단한 마음도 얻었다.
사회 교과서에서는 이를 ‘효용’이라고 부른다. 남들이 보기엔 손해처럼 보여도, 스스로에게 의미 있다면 그 선택은 이미 충분히 값지다.
어쩌면 나는, 내가 가지지 못했던 그 효용의 가치를 아이들을 통해 뒤늦게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눈이 소복이 쌓였던 지난겨울, 수업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얘들아, 오늘만큼은 봐줄 테니까 마음껏 놀아라!”
수업 시간에 시끄럽다고, 저 교사는 참 철도 없다고 동료 선생님들이 흉을 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의 엄격한 규칙은 눈 녹듯 사라졌다.
신난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신호를 주고받더니, 일제히 나를 향해 눈덩이를 던졌다. 나는 짐짓 당황한 척 오버하며 눈을 맞았고, 복수랍시고 눈을 뭉쳐 아이들에게 던지며 함께 눈밭을 뛰어다녔다. 넘어져서 생긴 무릎의 상처는 금방 아물지만, 추억이 없는 마음의 빈칸은 오래간다는 핑계를 대면서.
정답만 따르며 살았던 나의 사춘기 시절, 창문 너머로 그토록 부러워했던 그 반짝임을 아이들에게는 선물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친구에게 던지는 눈덩이 하나가, 훗날 힘든 순간을 버티게 해 줄 단단한 낭만이 되기를 바랐다.
패배의 아쉬움에 고개 숙인 아이들에게, 그리고 학원 창문 너머의 맑은 날씨를 애써 외면했던 열다섯 살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우리는 저마다 다른 형태의 봄날을 샀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