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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국 Aug 03. 2019

호머의 바다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땅이 끝나는 곳은 바다의 시작이다. 부산에서 거제도로, 해남 땅끝마을로 나를 이끈 바다를 향한 동경은 홋카이도로, 알래스카로 나를 밀어댔다. 태평양을 바라보며 상상하는 바다의 깊이는 고향의 앞바다를 두고 떠올리는 깊이와 다를 것인가. 나는 부서지는 파도 아래로 뻗어나가는 지각이 다다를 깊이를 헤아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수면 위로 열린 하늘은 또 얼마나 넓을 것인가. 나는 큰 바다가 시작하는 자리에 나를 놓아보고 싶어 알래스카로 향했다.

 구월의 알래스카는 백야와 극야 사이에 있었다. 태양은 아주 낮은 고도로 남쪽 하늘을 가로질렀다. 다섯 시부터 석양을 피워 올리는 서쪽 하늘은 아홉 시가 되어서야 마지막 불씨를 거두었다. 선선한 가을 공기 속에는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 이파리의 바삭한 질감이 스며 있었다.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내려 크게 들이쉰 북국의 대기는 청량하고 투명해 코 안쪽이 시큰거렸다.

 미국에도 땅끝으로 불리는 곳은 많을 것이다. 그중 가장 여러 사람들에게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곳은 역시 알래스카의 남서쪽 끝, 호머라는 곳이지 않을까. ‘도로가 끝나는 곳’, ‘땅의 끝’이라는 별칭을 가진 이곳은 핼리벗 낚시로도 유명하다. 핼리벗이라는 물고기는 거대한 넙치를 닮았는데 큰 것은 사람 키만 하다고 한다. 사람 키만 한 물고기가 사는 바다는 내가 살던 곳의 바다와 어떻게 다를까. 나는 공항에서 렌트한 쥐색 도요타 캠리에 짐을 실어 넣고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출발했다.

 호머로 향하는 길 옆에는 흰 벨루가 고래가 뻘밭에 산다는 쿡 만이 있었다. 얕은 곳에선 사람들이 한둘씩 뻘 위를 걸어 다녔다. 벨루가 고래는 더 깊은 곳에 산다고 했다. 컴컴한 해저의 진흙을 뒤지며 먹이를 찾다가 숨을 쉬러 가끔씩 표면으로 올라온다고 했다. 진창을 헤쳐내고 수면의 빛무리를 향해 올라오는 벨루가 고래를 상상했다. 음파를 내보내고 돌려받으며 서서히 떠오르는 고래의 윤곽은 아기의 볼이나 손가락의 윤곽처럼 부드럽고 선할 것 같았다.

Beluga Point - Cook Inlet, Alaska - 2018.09.19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도로는 피오르드의 깊이에 파묻혔다. 아름다운 케나이 반도의 끝에 다다르자 깎아지르던 피오르드는 완만해졌다. 마지막 언덕을 넘자 호머가 보였다. 마을은 언덕의 기슭, 바다와 맞닿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한편에는 바다를 향해 쭉 연장된 땅의 끝이 있었다. 육지가 바다에 뱉은 침, 호머 스핏이었다.

 호머에 들어서자 하늘은 점차 구름으로 탁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한 방울씩 보닛에 떨어졌다. 적막한 바닷가 주차장에 차를 댔다. 해변은 자갈밭이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어서 그런 걸까, 자갈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사방을 조용히 채웠다. 서늘한 대기는 북국의 바다와 얼마 전 읽은 <모비 딕>의 비린내를 품고 있었다.

Homer Spit - Homer, Alaska - 2018.09.19


 호머 스핏의 한 캠핑장에 텐트를 쳤다. 저녁 식사 준비만 해두고 맥주를 한 캔 땄다. 배낭여행자의 그림이 그려진 맥주를 마시며 해가 지는 걸 지켜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파도소리에 실려왔다. 귓불이 시렸다. 옆에 캠핑카를 끌고 온 가족은 해변에서 놀다가 돌아와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비는 그쳤으나 구름은 여전히 가득해서 호머의 하늘은 어두웠다. 다만 해가 지는 저편에는 밝은 노란색으로, 주황색으로,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는 틈새가 있었고 그를 받아내는 큰 바다가 있었다.


Sunset in Mariner Park - Homer, Alaska - 201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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